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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느와르 13화. 고요 속의 격류

oh오마주 오리지널 창작 소설

by oh오마주

우리의 시대가 도래했다.


연은 섬과 나란히 횡단보도를 걸으며, 한쪽 다리를 가볍게 걸었다. '절뚝 여야 해서 절뚝이는 느낌'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데, 뚝이는 어쩌지? 식당은 강아지 털 때문에 싫어할 거 같은데?"


"지금껏 어떻게 하셨는데요?"


"공원에 앉아 먹거나, 사서 집에서 먹거나 했어.“


연은 섬을 자세히 봤다. 그리고 다시 보이는 섬의 곤란한 수수함. 그의 입은 거짓을 말할 리 없는데, 그의 눈은 거짓을 말했다. 연은 눈에 가득한 갈색 선글라스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몇 겹의 시간과 몇 겹의 오해들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가 바라는 건 '돈'이 아니었을까?


"섬 형님, 오늘 식사 대접하는 대신, 식사비로 조금 더 드리면 어떨까요? 밥은 언제든 먹을 수 있지만, 뚝이는 뒤로 미룰 수 없잖아요."


섬의 동공이 커졌다. 지나가는 자동차에 그림자가 반토막이 났다가, 더욱 짙어졌다. 뚝은 네 발을 웅크려 세게 섬의 팔을 잡았다. '쉬, 쉬' 섬은 뚝을 달래고, 자신의 팔과 뚝을 번갈아 어루만졌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학생. 참, 내가 오늘 오면서 생각해 보니까, 이름도 안 물어봤더라고."


"홍지연입니다."


"홍 씨였어?"


"네. 엄마 성을 따랐어요."


섬은 보도블록 끝에서 발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젖은 앞머리가 흔들리며, 땀 한 방울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낙하와 번짐, 검은색으로 남은, 그림자도 고요했다. 섬은 뚝의 다리를 어루만졌다.


"우리, 이제 그만 보는 게 좋겠어."


연은 섬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는 아주 잠시, 굵은 섬광 같았다. 빠르게 외면하고는 마음을 뭉쳐 작게 만들고는 조심스럽게 굴렸다. 만남의 이유만큼이나 이별의 이유는 당연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건, 언제나 공포였다.


섬도 연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눈은 항상 섬에게 커다란 느티나무 같았다. 어린것이 기울어진 잎들을 짊어지고, 불어닥치는 바람에 흔들릴 때로 흔들리고는 단단하게 버텼다. 빠르게 외면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단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엔 돈이었다. 늘, 항상, 끝에는 돈이 문제였다. 들키지만 않으면 잘못된 것들도 정당성을 던져주는 합당한 이유였다. 이런 생각이 연에게까지 번지고 있었다. 느티나무에게 불이 붙고, 잎이 타고, 뿌리가 썩어갔다. 가까이 있으면 늘 무서웠다. 곁에서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 소멸하고 증발하는 사람들.


"학생, 난 뚝이만 욕심 낼 거야. 뚝이만. 딱 뚝이만. 나, 갈게."


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처로운 인생아, 나보다 가여운 인생아, 버려진 인생아. 섬의 팔을 잡았다. 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쥐고 섬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형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섬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주먹을 꽉 쥐었다. 더럽고 지독한 돈, 돈, 돈. 격하게 흔들리는 뚝은 낑낑대며 팔에서 낙화했다. 연에게는 침묵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낮게 울먹이는 연을 보며 차마 돈을 뿌리치지 못했다. 최악이었지만, 최선이었다. 서로 주고받고 헤어지는 게 가장 인간다웠다. 섬은 뚝을 끌어안으며 쓸어내렸다.


"미안하다, 미안해."


섬과 연은 눈물로 얼굴을 덮었다. 감정과 감정 사이의 숨결, 말하지 못한 문장들, 영원히 열리지 않을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것이 그들이 시간을 견딘 유일한 통로였다.


뒤돌아서 가고 있는 섬을 연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사는 모든 날들은 행복하라, 죽지 않은 순간까지 애도했다. 가슴 깊은 곳, 모종의 감정 집합체까지 끌어냈다. 마지막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띠리링-

전화소리에 눈물을 닦았다.


"여보세요?"

-"홍지연?"

"네... 누구시죠?"

-"김남우."

"..."

-"나를 찾고 있다고?"


연에게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의 답이, 느닷없이 마음 깊숙이 새겨졌다. 연은 항상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반복할까?' 궁금했다. 다정한지, 차가운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특별히 연을 찾는 이도 없었다. 물을 주지 않는 나무는 비 오는 날이 아니면 늘 목말랐다.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이 깨지면, 혼란스러웠다. 불안한 진심보다는, 왜 이상할까? 질문했다. 느끼는 인간의 감정이 아닌 일종의 데이터였다. 감정이 생긴 오류를 찾아 해결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여기에서 오류란, 평온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었다. 완전함을 추구하던 존재, 불완전함을 사랑하게 된 것, 매서운 오류였다.


"아버지신가요?"

-"그렇지. 그게 궁금한 거겠지."

"엄마와 저를 버리신 건가요?"

-"답이 궁금한 거야, 내가 보고 싶은 거야?"

"뭐가 더 중요한가요?"

-"글세?"

"만나서 달라질 게 없으면,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만나서 좋을 게 없다면, 대답만 듣겠습니다."

-"내가 집으로 갈게."

"밖에서 만나죠."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이미 집에 자주 오갔으니까."

"남자는 온 적 없어요."

-"오늘 그 사람은 남자가 아닌가?"

"그 사람은..."

-"걱정 말아. 혼란스러운 건 당연해."


나무가 아니라 남우였다.

동은 늘 나무라고 발음했다.

나무를 깎아 태어난 존재, 거짓과 진실 사이 피노키오.


결말을 상상하는 일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연은 상상 속에서, 백번이고 천 번이고, 어릴 적 기억 속에 작은 따뜻함을 회상하며 엄마-동을 용서했다.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건 세상 속에도 자라고 있었다. 자라는 것을 가위질해대는 것쯤 마음만 먹으면 쉽다. 해 질 녘 노을 밑에서 동은 언제나처럼 초콜릿을 삼킬 것이고, 그 모습을 애써 모른 척하며 노을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린 알몸으로 그녀에게 닿은 손부터 소멸되어 가는 상상을 했다. 문장 속에 흐트러지는 상상을 했다. 고요한 비극, 그러나, 상상이었고,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고, 돌아가지 못할 사이였다.


연이 다른 낯선 도시나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요한 열차에서 소설을 읽으며, 평화로운 여행을 가는 상상을 했다. 억새밭에 진흙처럼 잔뜩 묻은 세상을 털어내며, 말하지 않는 삶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이 결말에는 동은 없다. 온갖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모든 것들은 세탁되어, 눈은 파랗게 만들 것이고, 몸은 지금보다 크고 육중할 것이다. 희망은 없지만, 물밖에서 바둥대듯 아가미질을 하지 않아도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욕이나 욱신하게 하며, 벼랑 끝에서 몸을 내 던질 수도 있다. 슬프지 않은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지성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이 비극인지 알아챌 수도 없는 결말들을 내놓고 있었다.


고요 속의 격류였다. 억류일지도 모를.




2025년 4월 13일 일요일.

14화. 나무 파괴(가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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