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간시집_상실의 시간_4. 포도

보라색 열 알

by oh오마주
[조간시집_상실의 시간] 4. 포도


포도


열 알 정도면 충분해

가위로 밑동을 톡 잘랐다

굵은 물줄기로 씻고

또 씻고

탈탈 털어 투명한 그릇에 담았다


씻으면서도

알을 뜯으면서도

입으로 넣으면서도 생각했다


더 씻지 않아도 될까


알을 물고 짧게 빨아 당기고

알맹이와 껍질이 분리되었다

이빨과 혀를 바쁘게 움직이고

알맹이와 씨가 분리되었다


번거로움도 잊힐 단 맛

열 알의 짧은 행복이 아쉬워

검은 탄산을 들이켰다


후다닥 먹고 난 부유물이

그 옆 음료를 마시고 남은 컵의 얼음들이

민망한 마음 같았다


원래 각자가 살고 있었을 텐데

손에서 놓치면 사라질 액체처럼

말하지 못한 시간을 꼭 쥐고 있었다

제자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당황하고 두리번대고 있었다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우리들의 상실로 묶어서 내어 놓는다

잃지 않아도

찾지 않아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테니

쉬엄쉬엄 사람을 겪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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