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깨어있는 꿈

꿈, 톰, 연

by oh오마주


어디가 구체적으로 힘든지 모르는 매일,

깨어 있을 때도 꿈을 꾼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


이것으로 끝나라, 허락하시는 때,

이제 내게로 와라, 명하시는 때,

내가 가겠노라, 메아리에 대답할 때,


그때까지.







만나러 오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의 내 기분을 말해 미루는 것도, 이미 으스러진 사이에 부질없었다. 귀찮아도 토요일 오전을 써야 했다. 꼭 오전에 마무리 해야했다.


브라이튼 호텔 1층 카페는 브라이트너에게 가격만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다시 올일이 없을 테니, 완벽하게 마침표 찍기에 좋은 장소였다. 이별이 추억이 될리 없고, 인테리어도 평범했다. 원목식탁에 하얀 식탁보, 그리고 특별히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음식들이 초라하지 않은 이별을 만들어 줄것이다.


브런치를 먹으며 톰을 남자친구라고 말했다. 구남은 '벌써 남자친구가 생겼어?'라며 당황해서 커피를 한 모금했다. 억지미소라는 것을 알았지만 맞미소를 지었다.


구남 : 그래서,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종련 : 아니. 한국 가야지.

구남 : 그래도 괜찮대?

종련 : 끝이 있어도 나쁘지 않아. 좋아하는 마음만 두고 갈거야... 꿈꿨다는 듯이.


톰과 사귄다는 것 이외에는 사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혼냈다.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당연한 듯이 내게도 매일 매 순간 외쳤다. '욕심이야. 머무를 수 없어.'


구남은 가만히 접시를 들여다봤다. 순간의 정적이었지만, 어색하다고 해서 깨고 싶지 않았다. 이미 뒤틀렸다. 마음이 꼬일만큼 꼬여서, 풀 수 없었다.


구남 : 내가 꿈을 방해했구나?


비웃는 건지, 씁쓸한 웃음을 짓는 건지. 구남답지 않게 표정이 명확하지 않았다. 구남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받아 주리라, 뿌리치리라, 정확하게 응답할 필요가 없었다.


구남 : 내가 영국까지 온건.. 널..


'날 보러 왔다?' , '날 데리러 왔다?'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한부 내 꿈에 멋대로 찾아온 구남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구남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죽는다고 하니, 이제 와서, 평생에 한번 충동적으로 인생의 마지막에 내가 떠올랐거나, 혼자이기 싫거나. 추측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듣고 나면 구남에게 흔들릴 것만 같았다. 여태 우리는 변명을 하고, 그것 때문에 또 싸우고, 구남이 연락받지 않다가 구남이 연락 오면 만나고, 또 싸우고. 구남이 원하는 대로 해왔다.


종련 : 그만. 그저 죽기 전, 버킷리스트 정도라고 이해할게. 나도 그럴 것 같아.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이제 그만하자. 우리가 이제 와서 우리를 모른 척 하기엔 너무 멀리 왔어.. 더 사랑할 수 없어서 헤어졌는데, 다시 사랑하기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불쑥 말을 끊자 구남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울려는 건지 화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구남의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종련 : 나는, 나는 이 관계에서 상처받을 만큼 받았어. 값싼 동정심 따위로, 지나간 사랑 따위로, 내 꿈을, 깨어있는 나의 꿈을... 죽음을 기다리는 당신보다 지금의 내 삶이, 적어도 내겐 더 중요해. 준희 씨.”


구남의 이름을 부르니 알겠다. 구남과 있을 때 더 이상 미안하지 않은 내 마음, 미워할 겨를도 없는 내 마음, 꿈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 짜증 나는 내 마음, 내 마음은 진짜 끝났구나.


구남은 포크를 식탁에 '탁'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물을 한잔하고는 목소리를 누르며 말했다.


구남 : 한 번만 더 생각해 줄 수 없을까?

종련 :...

구남 : 솔직해 줘서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나는 얼굴도 봤고, 마음도 전했고, 너 마음도 알았고.

종련 : 뭐라고 하는지나 알고 하는 말이야?

구남 : 진작, 이렇게 시원하게 말하지 그랬어. 늘 답답했어. 평생 답답할까봐, 힘들었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얼마나 니가 어두웠는지 알아? 니 안에 갇힌 너는 깨도 깨지지 않는 얼음 같았어.

종련 : .. 내가, 약속이 있어서. 이제 그만 가자.


사업제안과도 같은 구남의 말을 단어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구남의 진심이 어떤지 살피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할 말을 전한 것, 구남이 받아들인 것, '우리가 마침표는 찍은 사실'만이 있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홀가분해졌다. 주문한 음식을 애써 끝까지 욱여넣었다. 각자의 음식을 각자 결제했다. 그리고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먼저 연락한 나의 잘못정도는 인정하고 싶었다.


구남 : 네가 현실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냥 둘 수 없었어. 우리 아이, 아이를 지웠다는 죄책감, 내 실수니까 책임지고 싶었어.

종련 : 실수?! 실수라면 더 책임질 이유가 없어... 그건 내가 감당할게.

구남 : 네가 방황하는 게 그 때문인 것 같아서.

종련 : 방황이라고 누가 그래?

구남 : ...


답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사과도 하지 않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우리는 거의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취된 어느 날, 딱 한 번이었다. 20대 후반인 나를 두고, 결혼과 출산만이 정답이라고 했다. 구남은 ‘취업도 어려운데 결혼이나 할까?’라면서 피임을 하지 않았다. 덜컥 임신이 되었을 때, '순서'를 운운했다. ‘가진 것 없는 우리를 위해, 함께할 미래를 위해 잠시 미루는 것뿐.’이라고 정의했다. 나 역시 경제적인 현실이 무서웠고, 두려웠다. 어렵지 않게 수긍했었다.


결론이 나버린 구남의 판단은 모든 책임을 안는 것, 그런 말을 이제와서 하는 것은 찌라시만도 못한 면책부였다.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틀린말이 아니라서 더 화가 났다. 붉어진 얼굴과 가쁜 숨을 고르지 못했다. 결과만 보면 나는 도망자다. 일도 사랑도 다 잃고 봇짐만 들고 다니는 도망자. 브라이튼 바다의 얕은 파도가 바람을 탔다.'쏴' 큰 소리를 들으니, 양가 감정이 생겼다. 가슴을 깊게 찌르고 있던 손톱만한 돌멩이가 밖으로 튕겨져 나간 듯한 자유였다. 한국 가서 일은 구하면 되고, 묵은 사랑은 정리되었고, '지금' 필요한 만큼의 짐은 언제나 함께 해줄 것이다.


5분 거리의 톰과의 약속장소로 달려갔다. 최고속력으로 숨 가쁘게 달렸다. 지면에 닿는 통증이 풍선인듯 인형인 듯 꾹꾹 눌러 이동하는 피로감도 기분좋게 뛰었다. 밝은 길이라 상상하며 내딛는 정면과 사선의 풍경이 함께 달렸다. 오늘, 토요일, 오후, 단어들이 그림자도 없이 터져 나왔다.


톰 : 헤이- 연아! 얼굴이 또 빨개!


톰이 불러주는 내 이름이 감격스럽다. 톰과 런던역에서 만났을 때도 이랬다. 나의 알 수 없는 얼굴을 보고 기꺼이 가슴과 어깨를 내어주었다. 톰은 나의 꿈이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다. 나의 가장 행복한 꿈이다.

고마운 마음이 북받쳐 톰의 양손을 잡았다. 그리고 톰의 손을 이끌어 내 얼굴에 갖다 대었다. 톰이 벅찬 내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톰이 알아들을 것만 같아서, 한국어로 말을 해댔다.


종련 : 나 오늘 완전히 헤어졌어. 나쁜노무새끼랑. 꺄- 너무 신나. 나는 자유다!

톰 : 악한 언더스탄리 앳톨 (I can't understand it at all.)

종련 : 잊지 못할 문장이네. 너랑 사귈꺼야.

톰 : 왓더, 드링크? 드럭?


미친 사람처럼 파하하 웃어대다가 꽈당 넘어질 뻔했다. 어구구 나를 붙잡다가 톰의 손이 왼쪽 손이 허리를 감쌌다. 톰의 오른손이 턱을 감싸고 코를 비볐다.


톰 :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톰은 엄마가 아기의 코를 비비듯, 어푸푸-소리를 내며 짧고 세게 비벼댔다. 응답으로 내가 더 세게 비볐다. 마음까지 간지럽기 시작했다. 더욱 붉고 뜨거워진 내 얼굴을 톰이 뜨겁게 바라봤다. '지금은 꿈이다.' 눈빛으로 말하는 순간, 뜨거운 두 입술이 닿았다. 톰이 나의 허리를 깊게 끌어안으며 가슴 깊이 안았다. 브라이튼 피어의 낡은 스피커에서 'Coldplay'의 'Paradise'가 나왔다. 톰과의 키스는 꿈과 같았다. 눈을 감고 물에 잠긴 듯 귀가 멍해졌다.


사랑은 구원이다. 톰은 메시아다. 사랑을 확인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성수와 같다. 성호만으로 성스럽게 하는 일련의 의식이다. 사랑의 의미는 꿈의 낙원일지도 모른다.


꿈이어도 괜찮다. 내가 꾸는 꿈이니까. 내 꿈이니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릴 것은

조그만 마음뿐입니다


부디 오래

머물다 가십시오


바람에겐 듯

사랑에겐 듯


<연>, 나태주 시인 ’잠시향’시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