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방어흔

외면해도 되는 당위성

by oh오마주


나의 틸카가 부장이었다면


영국의 톰이 한국의 구남이었다면


영국의 연아가 한국의 종련이었다면


상처가 아물듯 기억이 멈추어라.


꿈에서 살다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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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의 생활이 이미 ‘꿈’이었다. 그런데 또 자면서 ‘꿈’을 꿨다. 현실도피를 주제로 한 ‘꿈’.

숨을 엄청나게 참았다. 신기한 건 참으면 참을수록 참을 만한 ‘꿈’이었다.


이륙 전 비행장처럼 소란하고 귀가 째질 듯이 시끄럽다. ‘버티는’ 사람으로 ‘버티게 되는’ 상황을 ‘계속 버티게’하면서 한계를 시험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끝없이 시끄러웠다. 기대를 내려놓아도 실망이 계속 생겼다. 아닐 거라는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 숨 참는 게 힘들다가 그녀가 나타났다.


"연봉이 아깝다. 월급이래도 아깝고, 일당도 아깝고, 시급도 아깝다. 그런 애는 초급 줘야 돼."


부장은 내가 다가오는 발걸음을 곁눈질로 흘겼다. 분명히.


"그동안의 태도를 보면 알잖아. 완전 터무니없어. 아쉬울 것 없이 막 행동하니까."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짝 다리를 짚었다.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오징어 같았다. 홱 돌아서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이 말했다. '내 말이 틀렸니?'. 뒤 이어, '아니라면 덤벼봐.' 하는 것 같았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기 시작했다. 눈 안에 내가 바글바글 끓었다. 눈을 피하지 않는 나를 보며, 빨판 같은 혀 끝을 '끌끌'하려 혓바닥을 천장에 붙이는 모습이 아주 천천히, 보였다.


"뭘 해도 안 돼. 사회에서 그런 성격은 환영받지 못하지. 능력 부족문제가 아니야. 생각 없어, 배려 없어, 본인만 생각하고 대충 일하거든. 그게 젤 큰 문제지."


듣고만 있었다. 추상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충성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자주 하는 말이어서 익숙해졌지만, 늘, 전혀 괜찮지 않았다.


'박수쳐주지 않는 태도가 거슬렸겠지.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최고의 능력이 있어도 아부는 필수였다. 최소한 남들과 비슷해야 하는데, 그저 소신에 충실한 거야.'


평소에도 나를 무시하는 말로 회사 내의 소수의 사람들과, 나와 비슷한 직급의 사람들과 뒷말을 해댔다. 나와 어울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암묵적으로 이야기했다. 시작은 그녀가 했으나, 맞붙어 똑같이 싸우지 않는 편이 좋았다. 말이 길어지기만 했다. 걱정과 충고를 함께 해줄 울타리가 없었다. 집 없는 강아지였다. 소속감, 그게 절실하게 필요했다.


꼴 뵈기 싫었다. 나에게 윽박을 지른 바로 다음, 성격 좋은 척 다른 직원들에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절실한 사회친화적인 고미란 부장. 소리를 하도 질러대서 다들 '고라니부장'이라고 불렀다. 방금까지 한 이야기들을 다 들어놓고 이야기 중심에 서고 싶어 하곤 했다. '오호호-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어?' 라며 중간으로 슬쩍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그녀가 코 끝을 찡긋이며 '호호'소리 내어 웃는 가짜입이 오징어입 같았다. 검푸른 것이 부리같이 작은 것들을 씹어내는 상상을 했다. 나도 사람, 너도 사람, 우리는 모두 사람인데, 마치 고장 난 기계로 취급당했다. 부장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나를 불렀다. 그녀는 진급심사 때마다 마녀로 변했다. 내부 진급 심사 때마다 '남자만 진급하는 현실'에 한탄했다. 결국 어렵게 올라간 자리지만, 여전히 남자가 못되어 슬픈 여인.


"종련 씨는 주변 안 봐? 딱해서 말해주는 거야. 일을 못하면 잘하려고 노력을 해야지. 연차가 쌓여도 왜 변화가 없어?"


일과는 관계없이 더욱 매몰차게 대했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것이, 우습게도, 이것 또한, 참으면 참을수록 참을 만했었다.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여 듣고 있는 상황, 묘하게 '죄송합니다'로 끝나게 했다. 심지어 자괴감이 드는 나 자신까지 ‘다 꼴 보기 싫었다.’


“걱정해서 해주는 말이야. 인사이트를 주려고. 종련 씨는 늘 성격이 이런 식이니까 친구가 없지.”


직함이 있어도 매번 이름을 불렀다. 고라니부장은 단순해도 괴롭히는 데 늘 레퍼토리가 있었다. 그리고 늘 새롭게 구상하고 묵음으로 받아치는 건 내 유일한 반항이었다. 입 밖으로 오물조물 곧 튀어나올 것 같았다. 원래 하듯이 말을 목으로 삼키고 월급만 생각하고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거봐, 종련 씨도 메타인지를 가져봐. 거봐, 맞는 말이니까 암말도 못하네.”


뒤돌아서며 그녀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슬쩍 웃었다. 살짝 삐죽 나온 더러운 턱을 본 순간,


“인사이트? 메타인지? 무식한 소리 좀 작작하세요. 사람 막대하고 괴롭히는 거지, 개소리도 적당히 짖어야 조용히 들어!”


폭탄은 밟으면 터지고, 열받은 사람은 밟으면 입이 터지는 거다. 그녀는 작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사람들을 등지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오는 길이 길게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올 생각이 없다. 그 길로 비상계단으로 급하게 내려왔다. 어둡고 굽은 길, 끝이 닿아야 빛이 들어오는 길. 그 길이 끝나면 갈 곳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땀범벅이 된 채, 나와서 처음 사거리에 보이는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한숨을 쉬며 앉았다. 태양이 나무라듯 내리쬐었다.


'난 최선을 다해 참아왔어.'


억울한 마음에 올려다보며 변명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발바닥이 타 없어질 것 같았다. 일어나 편의점 바깥의 아이스크림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일생일대의 사고를 치고 난 이 순간에도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뭐냐, 잘났냐? 나종련, 너 너무 짜증 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쫀득하고 시원한 떡아이스크림처럼 뱃속에서부터 시원해졌다.




참았던 깊은 숨을 다시 내쉬었을 때, 나는 아직 브라이튼의 금요일이었다.


생각이 세신 되었다. 마음을 씻고 또 씻고 처음의 기분이 되었다. 고라니부장은 지금 잘 살려나? 나처럼 악몽을 꿀까? 아니면 그 성격에 또 다른 나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그 상처의 길이나 깊이만으로 상처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욕하고 뛰쳐나간 미친년'밖에 되어 있지 않겠지.


텅 빈 생각이 명치를 마구 찔렀다. 그때의 내 표정을 상상했다. 참 외롭다. 묵직했던 시간을 다시 겪는 것은 섬뜩했다. 반성해야 할까? 자존감을 근거로 다부지게 살아도 현실에서는 행복을 소망했던 마음은 쉽게 공중분해 되었다. 모두 과거형일 뿐이다. 행복을 현재형으로 정의했다. 그저 ‘미래에 느낄 수 있는 현재의 좋은 감정’으로 타협했다.


-띠링.

수업에 나가려고 컴퓨터를 끄려는데, 메일이 하나 왔다.


제목 : 련아..
내용 :
나 지금 홍콩이야. 경유해서 너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어.
만나서 이야기하자.


구남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쉬는 시간마다 메일을 들여다봤다. '정말일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토요일 톰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신경 쓰였다.


구남은, 정말로, 왔나 보다. 혹시나 싶어서 전 회사 동료에게 SNS 메신저로 쪽지를 보내봤다. 그가 이틀 전에 회사를 그만뒀다는 소식을 전했다. 회사를 옮긴다고도 하고, 장사를 할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했다.


-띠링


제목 : 제목 없음
내용 : 브라이튼 호텔 505호. 기다릴게.


수업이 끝나고 저녁시간까지도 고민하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들을 어떻게 버텨왔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진하고 독한 신호를 보내오는 것일까.


“연, 뭐 하니? 저녁 먹자!”

홈스테이 그린 이모에게 물었다.


“그린, 연애 상식 같은 거예요. 글로벌의 대답이 필요해요. 만약에 한국에서 헤어진 남자친구가 지금 여기로 절 만나러 찾아왔어요. 만나야 할까요? ”


“영국인으로써? 아님 여자로서?”


흥미로운 듯 턱을 괴고 그린 이모는 웃었다. 크고 움푹한 눈이 더 커졌다. 갈색머리사이로 유난히 하얀 앞머리를 한번 정돈하곤 나의 눈을 똑바로 봤다. 금세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왜 왔는지, 무슨 말을 할는지, 궁금하긴 하네.”



‘505호’


저녁을 먹는 내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컴퓨터 앞에 앉아 토익강의를 들었다. 현실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여전히 꿈이었다. 비현실적인 꿈을 깨어 있는 동안에 꾸는 것 같았다. 복잡하게 생각하니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원래 알던 구남이라면 다른 여자와 청첩장을 보내긴 해도, 나를 보러 여기까지 찾아오는 무모한 행동이 불가능했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메일이 그 이유라면, 회피하고 싶었다.


결론도 내지 못한 채로, 일단 호텔 앞으로 갔다. 호텔 앞에서 불 없이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브라이튼에서 담배를 말아서 처음 피워봤다. 카이는 무해한 듯, 월남쌈 싸 먹듯 쉽게 피어댔다. 심지어 싸는 동안 입맛을 다시 기도 했다. 캔콜라와 함께 선심 쓰며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호기심에 한번 빨아 당기고는 길거리에서 쿵-하고 큰 소리까지 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악'소리를 내며 깔깔 웃어댔다. 어지럽고 아픔, 낯선 즐거움이 함께 있었다. 비흡연자인 줄 몰랐다며, 냉큼 가져갔다. 그래도 기념이라며 새것을 하나 받아서 틴케이스에 담았다. 그걸 꺼냈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입에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타락한 것 같았다. 그때의 종련이 아니다, 아무리 다짐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파도가 잔잔한 밤에 시갈들은 아직도 시끄럽다. 도로아래 클럽에서 틀어놓은 음악비트에 땅이 흔들리는 것 같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만나도 싶은 마음이 한 번씩 오갔다. 사랑했던 마음과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방으로 향했다. ‘왜 왔을까?’ 궁금해서라도 만나야겠다.




구남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가슴 벅찬 표정이었다. ‘반갑다.’ 어색하게 인사했다. 인사 후 구남의 말을 기다렸다. 어색한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쥐어짜는 것이 보였다. 더 할 말도 없는데 어제 본 드라마부터 10년 전 대학 때 과제한 내용까지, 머릿속을 다 꺼내 놓았다. 처음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의 시간을 채우는 것. 토론이 없는 것. 구남에게 마음이라는 냄비가 있었다. 최선을 다하는 말들로 끓고 있었다. 그가 빨리 식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가 순간적으로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마음’


눈이 뜨겁게 바뀌고 ‘여전히 사랑해.’라는 말과 주체 하지 못하는 손은 얼굴과 등을 어루만졌다. 내 온몸의 살에 손이 스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심장박동과 숨소리가 느껴졌다. 초조하면서도 처음 살아있는 것을 바라보는 듯 경이로움이 그의 눈에서 느껴졌다. 처음 보는 구남의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미간을 찡그렸다. 한국의 '종련'이 늘 해왔던 배려인데, 영국의 '연아'인 지금은 표정관리가 안되었다. 구남은 키스를 하려다 나의 표정을 보고는 손을 놓고 내 시선을 애써 피했다.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할 말이나 해. 이메일 때문은 아닐 테고. 왜 왔어?”

-“연아…, 나 죽는다.”


구남은 큰 손으로 얼굴을 감싸 마른세수를 했다. 결코 길지 않은 말에서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 살아감에 대한 막연함. 죽는다는 말은 내 머리를 세게 쳤다.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최대한 난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미 상관없다고 되뇌었다.


“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구남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왜’, 그 말이 문득 튀어나왔다.


“폐암..”


구남의 아버지가 겪었던 그 병을 담담하게 말했다. '죽어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난 삶의 정리이고, 남은 삶의 시작이었다. 구남은 울지도 않았고, 내게 빌지도 않았다. 더 알고 싶지 않아 졌다. 구남이 날 찾아온 게, 먼 거리를, 긴 시간을 달려온 이유가 오직 구남 자신을 위해서였다.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감정,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을 거라고 작은 기대를 한 똥멍청이 었다.


천천히 일어났다. 구남에게서 빨리 도망치지 못한다면, 천천히라도 발걸음을 떼야했다.


-“갈 거야?”

구남이 물었다.


“갔다 올게”

-“갔다가 바로 올 거야?”


병이라는 것은 또 다른 인격체였다. 칭얼대는 것은 완벽하지 못하다는 증거라고, 질척대는 것은 남자로 살아가기를 포기하는 거라고, 참고 기다리면 된다고 했던 구남이었다.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기다릴 거야?”


단호하게 말하고 말았다. 이제 그만 가고 싶은 내 마음과 붙잡고 싶은 구남의 마음은 같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마음만 생각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결국 그가 백기를 들었다.


-“잘 자. 내일 봐.”

“그래. 잘 자. 내일 보자.”


높낮이만 다를 뿐, 같은 말이었다. 구남은 아쉬운 한숨을 뱉지 못해 목에 걸렸다. 호텔 방문을 닫고 나오면서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라 침을 꼴깍 삼키며 한숨을 목으로 차마 삼키지 못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실보다 죽고 나면 느끼지 못할 지금의 마음이 더 두려운 것만 같았다. 분명 서로 더 행복하려고 헤어졌는데, 구남이 허우적대다가 잡히는 지푸라기 라고 해서 잡았다. 그게 나였다. 전소되었다. '더 줄게 없다'라는 변명이 스쳤다.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사랑하는 척하며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정말 작은 사람이라서 내 가방에는 살며 필요한 것만 넣고 싶다.’


머릿속으로만 하는 말인데도, 잔인했다. 자신이 없었다. 구남의 마지막이 임박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구남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주는 것도, 구남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하는 것도, 모든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내가 외면해도 되는 당위성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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