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헤이 브라이튼

꿈으로의 초대

by oh오마주

꿈이었다

자는 시늉을 했나보다


허무한데 다행이다

아쉬운데 다행이다

아예 기억 못해 다행이다


초대받지 못한 기분은 착각이었을까.







그 영국 남자의 꿈을 꿨다.


그래서 더더욱 런던 생활을 미련없이 정리했다. 남은 기간 동안 브라이튼으로 어학원으로 옮겼다. 남은 기간이 시한부로 느껴졌으므로. 삶과 죽음의 시나리오를 넣으려다 고개를 저었다. 꿈과 삶의 경계라고 하기로 했다.


삶으로 돌아가면, 일상으로 돌아가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결국 돌아가면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수치로 정해진 한 부분이었다. 나이에 맞는 기성인이 되어야만 했다. ‘정해진 무엇.’


한정된 사실들이 놀아야 된다고 다그쳤다. 방금 영국에 온 듯 수선을 떨었다. 심지어 런던을 쉽게 잊게 했다. 대영박물관을 동네 서점 가듯 갔던 일상은 기억속으로 들어갔다.


브라이튼은 런던과는 달랐다.


바다가 있었고, 파티가 있었고, '정원의 낙원'이 아닌 '바닷가 노을의 낙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꿈이라고 한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하의 바다와 그를 둘러싼 클럽, 새벽까지도 시간이라는 변명을 달지 않는 도시. 브라이트너들은 계절을 쉽게 무시했다. 걸친 모든 옷들을 홀딱 벗어도 패션이었다. 성별 따위로 사랑을 제한하지 않는 도시였다. 물론! 잔고가 바닥이 난 것도 나만의 개성이었다. 주머니에 맞춰서 살아도 슬프지 않았다. 슈퍼에서 1파운드 햄샌드위치를 사서 몇 분만 걸어서 나오면 자갈이 무더기로 쌓인 바닷가가 있고, 그 바닷가에 딱히 배경음악이 없어도 순간순간 들리는 영어들이 고급스러운 재즈 같았다.


가방을 멘 채로 자갈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다리를 쭉 펴고 바다만 바라보며 먹어도 ‘굿 다이닝’이었다.


여유로운 시간 사이에도 급할 때가 있었다. 4시에 문을 닫는 서점. 수업 후 뛰어야만 했다. 빽빽한 책들 사이로 '알랭 드 보통'의 'Assay in love'의 한 구절을 찾아보는 오후가 좋았다. 브라이튼은 내게 선글라스 씌운 수필 같았다.


일상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아침이 일찍 시작했던 런던에서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달고 살았는데, 오후가 즐거운 브라이튼에서 1파운트 햄샌드위치를 먹어도 밀크티와 스콘을 먹었다.


꿈의 정박, 브라이튼 피어.

신기한 곳이다. 인천의 월미도 같달까, 부산의 태종대 같달까, 대구의 수성못 같달까. 공원보다는 상업적이고, 놀이동산보다는 오락실에 가깝고... 그렇다고 작지 않았다. 바다 위에 나무판자를 크게 깔고 그 위에 작은 놀이동산을 올렸다. 거의 모든 시설이 있지만, 입장료는 없었다. 밤이 참 길었다.

4시부터 내려쬐는 브라이튼 피어의 노을을 가만히 보는 날이 많았다. 바람을 거슬러 밤의 브라이튼 피어를 걷는 것이 좋았다. 뽀득 뽀드득거리는 나무 판자 소리가 좋았다.


피시앤칩스를 사서 바다와 직선으로 배치된 나무 의자에 앉았다. 고등학교 음악실에나 있을 법한 의자가, 꼭 바다의 음악실 같기도 했다. 검은 바다의 소리는 바람을 탔다. 어쿠스틱한 웃음소리를 느꼈다. 그저 각국의 친구들과 나눠 먹곤 했다. 사실 피시앤칩스가 맛있지는 않았다. 바다 생물을 튀긴 것 치고는 하얀 맛이었다. 초장이 필요했다. 씹을 수록 혀끝에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꿈 같았다.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흩날려 얼굴을 간지럽히면, '그래 꿈이 아니지.' 웃었다.


조금 더 밤이 깊으면 브라이튼피어는 조명을 더욱 환하게 켰다. 도시의 등대가 되었다. 친구들의 눈에 글썽이는 듯한 노란 조명들이 내 눈에도 비췄다. 배에게도, 나에게도 등대가 되었다. 바닷가의 지하 클럽에서 큰 음악소리까지 새어 나오기 시작하면 매일이 작은 축제였다. EDM의 리듬에 신나기 시작했다.


“쿵쿵 잘도 내뱉네.”

“훕훕 빨아 당기는 거지.”


비트박스를 한국식으로 ‘북치기박치기’했다. 유럽식은 비트를 쪼개며 투명한 기계를 소환해 디제잉을 했다. ‘후룹룹루루’ 소리가 개그맨을 떠올려 처음으로 ‘파하하’ 웃음을 내뱉았다. 결국은 아시아와 유럽의 논쟁 속에 정답은 취하는 거라 결론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쉬운 발걸음이 찐득했다. 한걸음마다 힘을 실어야 했다. 골목의 작은 바에는 많은 '남남커플들'이 자유롭고 여유로운 공기를 주도했다. 취기에 용감해져서 펍에 들어가, 아무에게나 '하야!'인사했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나는 게이, 쟤는 레즈' 라고 하고, '너는 스트레이트냐'고 물었다. 사랑의 취향이 아예 없다고 대답했다. 나르시시즘에 젖어 나만 사랑한다고, 매일 거울보면서 데이트한다고 했다. "흠, 인터레스팅, 치-어-스!"하며, 술을 마셔댔다. 아무렇게나 말해도 바보처럼 좋아했다. 그림자도 어둑한 밤이 오면, 안개가 자욱해졌다. 성인 여자만한 시갈(Sigal) 새들의 깡패같이 떼를 지어 거리를 활보했다. 직립보행이 사람과 동물의 경계조차 잊게 했다.


늘 명심해야만 했다. 한정된 시간은 '대출받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끝나면 돌려줘야 하고, 응당 대가도 치러야 했다. 내가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니, 순간들이 아찔하기도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무거웠다.


“지금은 꿈이고 나의 작은 일탈이다. 행복해야만 한다.”


못하는 것도 잘하려고 바들바들 떨면서도 인생의 행복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 마치 행복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것처럼, 그 행복이라는 것에 조금씩 집착하고 ‘원한다’라는 말로는 다 못할 정도로 원했다. '이기적일수록 행복하다.'는 결론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매 순간 '열심히 이기적'일수록 마음이 더욱 편하고 좋았다. 그 임계점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조금씩 삶의 방정식이 정해져 가고 있었다. 브라이튼에서 일주일은 런던에서 치열했던 나의 어학원생활을 잊게 해 주었다. 살면서 브라이튼의 추억이 삶의 정점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갑작스럽게 남동생에게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왔다. 서로 ‘용돈구걸’ 이외는 한 적이 없던 남매인데, 먼 영국까지 연락이 왔다.


‘비보; 금붕어 1마리 사망’


'멍청한 새끼', 욕을 했다. 장난스러운 메시지에 화가 치밀었다. 슬픔을 전하는 방식이 매우 부적절했다. 단지 일주일, 아빠가 잠시 할머니댁에 간 사이였다. 아빠가 물을 갈아줄 틈도 없이 배를 뒤집고, 눈도 감지 못했다. 아빠가 돌아와서 어항을 봤을 때,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그 사이로 남은 네 마리는 밥을 갈구했다. 사료통을 보고는 배고픔을 이유로 붕어대가리들은 입을 뻐끔거렸다고 덧붙였다. '붕어대가리라고 하지말라고! 새대가리야!', 분에 못이겨 발을 쾅쾅 찍었다.


분명 일상적인 날이었다. 차가운 무언가가 갑자기 훅 스쳤다. 학원을 가려고 양치를 하다가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힘이 빠진 채, 다시 이불에 들어갔다. 시계를 확인했다. 속이 매스껍고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싫었다. 기분이 안좋을 일이 없었는데, 그저 죽었다는 오란다가 떠올랐다. 불쌍하고 징그러운 형태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움직이기 귀찮고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생각이 루프에 빠졌다. 우울, 불안, 외로움, 불행이 있다면 그때였을 것이다.


우울하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것일까? 우울함은 나의 일상이었는데, 나는 아름답지 못한 것일까? 억지로 일어나 우울한 아침도, 혼자 먹는 우울한 밥상도, 우울한 통장잔고도. 우울한 것은 아프고 괴롭기만 한 것일까.


이별노래 가사도, 영화 속 주인공의 시한부인생도, 소설의 비극적인 결말도, 이야기속 아름다운 것들은 우울하기도 하는데 나는 어떤 아름다움을 위하여 우울한 것일까.


얼마나 불안한 생활들인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숨을 참고 잠수를 하겠지. 이렇게 시원하게 숨을 쉬어봤는데, 견딜 수 있으려나? 생각하면 눈이 반이 접히는 가족들 생각. SNS의 사진을 보면서 댓글로 부럽다고는 하지만 속으로 현실감 없이 궁상맞다고 생각하고 있을 랜선 친구들. 그리우면서도 짜증 나는, 사이와 사이에 생각나는 구남과의 추억들.


누군가의 ‘외로움’을 나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늘 위험했다.


아픔과 극복을 반복하면서 나온 단어이고, 삶이었다. ‘누군가에게 쓸모없는 존재로 남는 것, 더이상 누군가의 아무개가 될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남자를 보면서 벌거벗은 채로 무감각한 그 사람의 아픔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외로움이 투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늘 위험했다.


‘눈물’이 내 삶의 평화 속에 가끔 찾아온다. ‘온실 속의 화초’는 야생에 나오면 안 되는데, 나왔으면 잘살아야지, 회귀했다. 다시 돌아간 온실은 너무 덥고 답답하다.


구남은 아버지에게서만 커서 ‘어린 시절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져. 늘 부족해.’ 라고 했었다. 눈물을 흘리며, 나 역시 ‘엄마의 큰 자리 때문에 삶이 불행해.’ 말했다. ‘너와 나는 다름’을 이야기하고 ‘너는 나와 다름’에 대해 설득하는 식의 대화였다. 홍역에 걸렸을 때의 열병 같았다. 나는 '인생 최대 아픔의 시간'을 갱신했다. 국소의 통증은 없는데, 어지럽고 눈물이 났다. 덤덤해지려 노력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세상에 혼자인 것 같고 외로웠다. 아름답고 우울한 내 젊은 날, 어제와 같은 오늘은 기분이 어제와 같다. 최소한 남들의 눈에는 흐린 날의 구름처럼 우아하고 싶다.


걱정만 하기엔 지금 인생을 놓기엔 너무, 아깝다. 내. 청. 춘.


오만가지 생각에 스트레스에 한 번씩 정수리에 열이 나기도 했다.


클럽도, 공부도 즐겁지 않았다. 홈스테이 침실에서 혼자 있는 게 편했다. 처음으로 외국에서 일주일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몇 달을 집에 있어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학원과 집만 오갔다.


나의 구원자는 틸카, 그녀였다.


옆집은 어학원의 기숙사였는데, 거기에 살던 독일 친구 틸카와 대화가 잘 통했다. 틸카는 키가 크고 얼굴이 주먹만 한 삼십 대 초반의 여자였다. 독일 자기 농장에서 관광객을 안내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처음 만남에서 외국 손님이 많아서 영어를 배우러 왔다고 소개했다. 그녀는 꽤나 쾌활했다. 외국 시트콤에서 본 듯한 성격이었다. 춤추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영어를 독일어와 섞어서 농담을 할때면 귀여웠다.


틸카는 나를 먼저 찾아주는 편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때면, 영어를 말하지만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손짓 발짓 말도 안 되는 영어로 고개를 서로 끄덕이는 대화를 하고 나면 종교생활을 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은 독일 맥주를 마시자며, 병맥을 사놓고 자기 방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맥주를 한 병쯤 비웠을 때, 조심스럽게 향수병이라고 말했다. 현실이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가까워 온다고 말했다. 틸카는 맥주를 한 모금 꼴깍 삼켰다.


“연, 삶은 계속되어가는 거야. 살면서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좋아하는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음식도 좋아하는 게 잘 안생겨. 즐겨야지. 리베!”


그녀는 늘 그랬듯, 내 생각이라고 하며 따가운 충고를 했다. 금세 현실에 고통스러웠다. 결국 그날 만취한 나는 구남에게 메일을 썼다.


제목 : 잘 지내?
내용 :

만나는 동안 구구절절 뭔가 너에게 많이 바란 것 같아.
삶은 계속되는 건데 말이야.
이제는 당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기억이 안 나.
우리 잘 헤어지고, 서로 더 잘되어가고 있는 거겠지.

나처럼 너도 잘 지냈음 좋겠어…


다음날 아침에 술이 깨고, 지구를 떠나고 싶었다. 술 먹고 전화도 문자도 안 되니까 이메일을 썼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골치 아프게 앓았던 향수병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그저 여권에 발도장 하나 찍은 것에 불과한 것 같아 한없이 무너졌었다. 내 의지로 정말 간절했던 무언가를 해냈다는 생각 하나만이 손을 뻗어 어렴풋이 구했다. 그리고 질척거림이 스스로를 깨닫게 했다.





일정이 한 달쯤 남았을까? 영국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학원가는 길에 1파운드 샌드위치와 1파운드 프랑스 물, 1파운드 스타벅스 오늘의 커피를 샀다. 처음에 브라이튼에 왔을 때 나는 한국인의 ‘빨리빨리’와 런던의 도시생활에 익숙해져서 거의 뛰어다녔다. 여유롭게 바닷가를 거닐었다. 지하철 타는 런더너에서 신발 타는 브라이트너가 되었다. 점심은 늘 바닷가의 자갈들 위에 앉아서 먹었다. 여느 때처럼 학원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앉아서 먹을 때였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시갈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열심히 먹고 있었다.


“You, right?!”


그 사람이었다. 계속 생각하고 있다가 오늘 하루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났다.

나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덜컥 안아버렸다. 영국에 와서 안고 뽀뽀인사가 익숙해졌지만, 더욱 설레는 포옹이었다.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한번 만났지만, 10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친한 척을 해댔다.

“Again reddish"


그는 붉어진 내 얼굴을 놀렸다. 그런 게 또 싫지는 않아서 ‘hey'하고 어깨를 툭 쳤다. 크게 웃고 나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웬디의 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 친구들과 펍에 축구를 보러 갔다가 영국 대학생 남자에게 대시받은 이야기를 했다. 60대의 영어 선생님인 웬디가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호의적인 영국 젊은 남자아이들은 의도가 분명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그녀가 보기엔 27살인 내가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밤비노(한국의 우리 똥강아지 어감)로 보인다고 했다. 영국 젊은 아이들이 동양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계속 작동되는 복사기 위에 짧은 교복을 입고 앉아서 손가락을 입에 살짝 물고 야한 포즈를 취하거나, 일본 동영상에서나 나올법한 패티쉬 같은 것들을 떠올리기도 한다고.


그럼에도 경계는 이미 풀려있었다. 런던에서 브라이튼으로 너를 만나러 왔다고 농담 섞인 진심을 말했다. 그는 ‘헤이’ 하며, 나의 어깨를 살짝 손으로 찔렀다. 그의 하얀 손에, 그의 미소에 나도 웃었다.


먹던 샌드위치를 가방에 쑤셔 넣고 그와 브라이튼 피어를 걸었다. 바다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고, 클럽 문을 뚫고 나오는 알 수 없는 음악소리에 내 심장도 쿵쾅거렸다. 종이컵만한 잔에 따뜻한 뱅쇼를 샀다. 그리고 우리는 난간에 손을 기대고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어디서 지내?”


그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슈퍼 옆에 작은 골목길 마지막 집에. 어학원 홈스테이야.”

놀라는 눈치였다.


“그린씨네 집?”

“응. 아는 집이야?”

오랜 친구 집이라고 했다. 그는 바닷가에 활짝 핀 노을 같은 눈을 하고 고개를 바닷가 수평선을 향했다. 써니. 그녀였다. 작년에 교통사고로 잃었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딸.


“이름도 모르네.”

톰. 그의 이름은 톰이었다.


“나는 한국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연아’이라고 불러줘.”

“피겨여왕?”

피겨스케이팅과는 관계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나를 퀸이라고 불러댔다.


“혹시 이번주 토요일에 세븐시스터즈 같이 갈래? 영국에서 일정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다음 주까지 브라이튼에 있고, 2주는 영국 투어 하려고.”


톰은 쉽게 수락했다. 갑자기 들뜨고 행복했다. 핸드폰이 없는 게 처음으로 아쉬웠다.

토요일 12시 브라이튼 피어 앞.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