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개명

그날의 기분

by oh오마주

억울함은 다 걷어내려 해.

감정은 거품처럼, 시간이 지나면 잔잔해져.

바뀔까, 기분이.

잊힐까, 그날의 기분이.





기억은 신기하다. 시간을 자유자재로 만든다. 각색도 마음대로다.


취업에 매번 실패했던 샛노란색이었던 나는, 유명인이 되어 죽는 꿈을 자주 꾸었었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렇다. 아직 집을 구하지 못한 나는, 다시 엄마가 이끄는 움막으로 회귀했다.


소크라테스가 되었던 그날의 꿈이었다. 매우 똑똑했지만, 매우 시대착오적이었다.


“소크라테스, 죽기 전 할 말이 있는가?”

-“악법도 법이니, 따르겠소. 하지만 나는 죄가 없소.”


흙먼지가 흑백으로 흩날렸다. 단두대 위에서 목이 댕강 잘리는 순간, ‘학’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소크라테스의 단두대 꿈이라니. 새벽 2시보다 더 감성적인 아침 8시다. 아침이지만 여전히 꿈이다. 5년 전의 악몽인 채로.

종련 부 : 어여, 마누라, 토요일 새벽부터 어디 나가? 아침밥은?

종련 모 : 대충 먹어! 8시에 영수엄마랑 목욕탕에 오전반 가기로 했어. 귀남이는 어제 밤새 공부하던데.. 아, 그냥, 깨우지 마! 깨면 냉장고에 생선 데우고 밥 좀 챙겨줘! 금붕어 밥도!


방문 넘어 들리는 부모님의 대화가 들려도, 잠든 척 숨을 죽였다. 나는 깨어 있는 채 침대에 누워있다. 일상적인 타박 속에 쭈그러들고 싶지 않았다. 반박은 고사하고 존재를 부정할 수도 있는 극단적인 아침을 맞이하기 싫어서. 엄마 친구 아들인 영수,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영수의 엄마는 목욕탕 일진 중 일진이다. 일진 무리들의 목욕탕은 박여사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녀의 동지들에게는 나는 그냥 첫째고 귀남이 누나였다. 박여사는 귀남이 엄마고, 아빠는 귀남이 아빠였다. 우리 집은 모두 다 바쁘다. 엄마는 나가서 영업하느라 바쁘고, 아빠는 집에서 쉬느라 바쁘고, 우리 귀한 귀남이는 공부하는 척하느라 바빴다. 나는 숨 쉬느라 바빴었나?

‘할 수 있다.’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탈출하고 싶을 뿐이다. 늘어질 만큼 늘어진 고무바지처럼 내 시간에 내 숨도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나를 찾아주는 곳이 없다.


핸드폰을 잡고 문자만 기다리는 내 모습이 싫었지만, 싫어도 하고 있는 내 모습도 싫었지만, 싫어도 싫지 않아야 하는 것도 싫었다. 작은 진동에도 귀에서 심장까지 웅장하게 뛰었다. ‘귀하와 같은 우수한 인재와 함께 하지 못한 것에…’ , 심지어 광고 문자 소리에도 기운이 빠졌다. 돈 없는 건 어떻게 알고 할인행사 문자만 수두룩했다. 나랑 비슷한 스펙의 친구들의 결혼문자도 한몫했다.


그보다 전에 가장 간절했던, 쥐어짜지 않아도 생각나는, 지나치게 간절한 게 있었다.


‘개명'


건너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작명소를 찾았다.


복권 : 원래 이름이 뭐라고? 종년?

종련 : 니은 아니고 련, 종련, 입니다.

복권 : 이게 무슨 뜻이야? 한자가 뭐라고?


작명소에 이복권 소장님이신가, 박사님이신가? 그분께서 이름을 한글로 쓰고 동그라미를 연신 그리셨다.


복권 : 련, 이 글자가 한자가 있나? 네이버에 검색해 볼까? '누에 나방이가 알을 낳아 놓은 누에의 씨받이'..?


이상하게 부끄러워지는 통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꽉 쥐고 책상에 탁, 치며 말했다.


종련 : 하찮은 느낌이 거슬려요. 단단한 이름으로 바꾸고, 새 출발 할래요.

복권 : 암, 그래! 새 출발 해야지! 이 ~ 소장님이 멋들어지게 바꿔줄게!

종련 : 네! 무조건 바꿀래요.


이름을 바꾸고 상장처럼 인쇄해서 직인까지 찍었다. 소장님은 내게 졸업장에나 끼워줄 만한 벨벳 상장집에 상장을 끼워 두 손으로 건넸다.


복권 : 이제 뒤돌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응원할게요, 나주연 씨! 크, 내가 지었지만 멋지다. 이름을 자주 불러주라고! 바뀐 이름을 계속 불러줘야 운이 또 따르는 거야. 그리고 한 가지 팁! 올해 만나는 남자 꼭 잡아. 내가 다음 예약이 있어서 길게는 말 못 하지만, 올해 좋은 남자 만날 거야.


철문을 닫고 나오는 길에 한층 따뜻한 공기가 불었다. 기지개를 한번 크게 켰다. 그때 눈앞에 겨울의 장미꽃이 보였다.


"이게 뭐지?"



겨울에도 봄꽃이 핀다. 겨울 아침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 철쭉이 삐죽 올라왔을 때에도 놀라서 발을 헛디뎠다. '세상이 미쳐가니, 꽃도 미쳐간다.'라고 했던 사람이 생각났다. 정말, 세상은 걱정할 만큼 미쳐가는 것일까. 충격도 잠시, 같이 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계절에 이게 맞나? 장미는 맞나?' 물어봤다. 누군가가 대답해 주었다. '4계 장미'라고 하는데, 온도만 맞으면 이렇게 활짝 핀다고 한다. 덩그러니 혼자만 피어있는 모습이 외롭기도 하고, 꽃밭의 '스타' 같아 화려해 보였다.


일상을 잠시 멈추고 4계 장미의 미소에서 겨울의 향기를 느끼며, 한낮의 꿈을 꾸었다.




틈틈이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돈으로 들어갈 고시원을 찾았다. 캐리어에 노트북과 간단한 짐만 챙겨서 노숙이라도 하겠다며, 월요일 밤에 야반도주했다. 부모를 떠나는 아기 새의 아름다운 비상 말고 급하게 도망치는 독립군의 전투적 탈출느낌을 충분히 주고 싶었 달까.


주연 부 : 이불은? 당장 뭐 덮고 자?

주연 : 인터넷으로 시켜놨어. 이미 와있어.

주연 부 : 아빠가 데려다준다니까.

주연 : 옷밖에 없는데 뭐. 택시 타면 금방이야.

주연 부 : 집에 자주 올껴?

주연 : 모르겠어.

주연 부 : 그럼 주말에라도 올껴?

주연 : 주말엔 밀린 잠도 자야지.

주연 모 : 이름 바꾼다고 인생이 바뀐다니?


신발장 앞에서 아빠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박여사는 한번 흘기고는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탕 닫았다. 문 닫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내 가슴도 쿵 내려앉았다. 택시가 밖에서 기다린다는 핑계로 얼른 집에서 나왔다. 택시에 짐을 싣고 뒷자리에 앉아 집을 올려 보는데, 빨간 벽돌이 까맣게 보였다. 아빠를 집에 버리고 도망가는 것 같아 잠시 미안해졌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쉽게 잊혔다.


집 떠나면 고생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고생이 끝난 것 같았다. 나만 생각하며 산다는 게 마음에 날개를 단 것 같았다.


주연 부 : 딸, 이번 주말에 집에 와. 삼겹살 굽자.

주연 : 중요한 원서라... 미안해요.


문자로 하는 하얀 거짓말. 그런 것들이 나에게 보장해 주는 평화와 자유.

토요일, 늘어지도록 자고 늦은 오후에 혼자서 안동 찜닭 한 마리와 사이다를 섞은 막걸리를 한 병 마시고 취해서 잠들 때 그렇게 행복했더랬다. 정말 내 인생이 막사(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것)만큼 청량하고 자극적이었다.


그래도 그날 아침은 달랐다. 문자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또 문자다, 문자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하고 지독스럽게 귀찮은가, 하는 찰나였다.

‘나주연 님, 유학넷 합격을 축하합니다. 신입교육 및 입사서류 등은 홈페이지를 확인 바랍니다.’ 그 문자가 나를 존재하게 하였다. 열리지 못했던 열매를 수확한 것이다. 드디어 재취업성공! 핸드폰 진동에 하늘이 열리고 땅이 솟는 느낌이었다. ‘눈이 높니, 중소기업도 취업을 못하니, 대졸 멍청이니’ 온갖 설움과 수모를 극복한 내가 스스로 대견했다.


경화 : 나주연 주임, 반가워요. 배경화 과장입니다. 경험 잘 살려서 잘해봅시다!

주연 :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상사라면 치를 떨었던 내게, 경화과장님은 사석에서 '언니'라고 부르라 했다. 남에게 나를 칭찬하고, 늘 격려해 주는 최고의 상사였다. 혹은 고라니가 억측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불공평하게도 고라니는 승승장구했다. 이사직함으로 회사를 이적했다. 이제 그녀의 불행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주연이니까.

내가 주로 맡았던 고객들은 단기로 어학연수를 가고 싶어했던 퇴직자들이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알기에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다. 진심이 통했을까, 금방 대리를 달고서는 은행대출을 업고 완전한 독립공간을 마련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35년 된 어르신 15평 아파트지만 꽤 훌륭하다. 거실 겸 안방에서 TV도 보고, 옷방도 있다. 주말에는 11시에 일어나서 드립 커피에 땅콩잼 토스트로 브런치도 즐긴다. 따스한 햇살아래 베란다에 토마토화분도 하나 키운다. 재즈를 틀면 뉴욕, 힙합음악을 틀면 여기가 LA한인촌이지. 거울에 붙여놓은 브라이튼 피어사진과 톰의 예정된 국내 공연 티켓을 번갈아 보며 거실 통창에 비친 내 모습에 절로 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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