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파,벽돌책] 4. 새의 선물 (11일 차)

시간을 삼킨 성숙함

by oh오마주

[책정보] 제목 : 새의 선물, 저자 : 은희경, 장르 : 장편소설, 출판사 : 문학동네

[글정보] 제목 : [격파, 벽돌책] 4. 새의 선물, 글쓴이 : oh오마주



파트 설명


'1. '일기' 파트는 작가가 하는 말 중에 내 가슴에 꽂힌 몇 구절, 문단이다. 노트에 기입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손으로 쓰는 문장은 머릿속에 박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즐겼던 공부 방법이기도 하다.


'2. 'omg'Oh_hoMmage_oriGinal이다. 아주 짧게 작가가 쓴 글을 보고 나의 생각과 감정에 연결시킨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고 싶었다. 인간의 창작은 한계가 있다. '나'의 생각에 '작가의 생각'이 부분적으로 스며드는 것이 신기했다. 다르더라도 비교하며 즐기는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 독보적인 표현에는 감탄과 존경, 오마주가 있었다. 소설을 따라가면서도 멀리서 관망하기도 하고, 가까이서 등장인물의 감정에 휘말리기도 했다.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도 그 순간을 선물할 수 있기를.




1. 일기


323쪽 : 그림자는 변소 앞을 지나고 장군이네 마루 앞을 거치더니 우리 집 마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물 앞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돌려 우물 쪽을 한번 힐끗 쳐다보기도 했으며 그런 다음 이윽고 내가 서 있는 마루 앞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씩 웃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가 허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325쪽 : 나는 삶의 기회에 대해 생각했다.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중략-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


327쪽 :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은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에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332쪽 : 이모로서는 이 순간이 슬펐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울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이모는 초승달의 희미한 달빛 아래 몸을 떨며 울었다.


335쪽 : 왜 혼자 오냐고 할머니가 물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꼭 대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중략-

할머니는 마춤하게1) 그 순간 성숙한 남자의 배역을 맡아 출연한 허석의 연기를 거부감 없이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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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춤하게 : 알맞게


339쪽 : 유지 공장으로 가까이 갈수록 주위가 점점 환해졌다.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사이로 엄청난 불길이 내뿜고 있는 공장 건물들이 보였다. 그 앞에는 소방수들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발밑에는 새카만 것들이, 바로 타버린 시체들이 굴러다녔다.


340쪽 : 바람이 잦아들면서 불길이 잡힐 즈음에는 벌써 날이 훤히 밝고 있었다. 온 읍내가 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맞이한 참혹한 아침이었다.


344쪽 : "이상하게 보이냐? 내가 벌레를 먹는 것이나 내 몸이 벌레들에게 뜯어 먹히는 것이나 다 좋은 일이지. 벌레들한테 뜯어 먹히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게 바로 죽음이고. 진희야, 그러니 죽는다는 건 얼마나 평화로운 일이냐..." 그때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선생님이 성냥개비를 부러뜨려서 더러운 손톱 밑을 후벼가며 뜨문뜨문 늘어놓는 그 말과 분위기에 괜스레 숨을 죽였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350쪽 : 즉 이형렬에 대한 감정이 깨끗이 사라져 버린 데 대한 회한, 사랑이 그렇게 허망한가에 대한 허무감, 게다가 허석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일으키는 분열의 한 증세인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356쪽 : 끝내 마음속에 있는 작별의 말을 나누지 못한 채 댓돌로 내려서는 허석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며 나는 이제 그와 나 사이에는 완전히 막이 내려져버렸음을 알았다. 그렇게 해서 내려진 휘장2)을 보니 그 위에 금색으로 수놓아진 사랑의 문장3)도 퇴색하여 실밥만 나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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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휘장 : 피륙을 여러 폭으로 이어서 빙 둘러치는 장막, 의역하면 커튼

3) 문장(紋帳) : 무늬의 견본을 모은 책



358쪽 : 시집을 안 간다는 이모의 표정은 결연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 침통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삶을 알기 시작한 이모의 아픔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며 바로 그것이 이모의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이기도 했다.


359쪽 :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1. 유지 공장의 소설 속 쓰임, 불타버림

'바람이 잦아들면서 겨우 불길이 잡힐 즈음에는 벌써 날이 훤히 밝고 있었다.(340쪽)'라는 부분에서 앉아 있던 식탁으로 빛이 쫓아왔다.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을 다녀온 기분이다. 유지 공장의 냄새와 시대를 나타냈던 배경 장치, 유지 공장이 불타버린다. 이모는 이별을 극복하고 사랑을 시작하고, 진희도 허석과 마음속으로 이별을 고한다. 도시가 되어 가던 동네는 다시 자연이 남았다. 불이 났을 때, 진희는 눈물을 흘리며 이모와 허석의 안녕을 기도했다. 유지 공장이 불타버린 의미는 완전한 새로운 시작이었을까.


2. 시간을 삼킨 성숙함

진희와 이모는 함께 성숙하고 성장한다. 진희는 자신과 이모를 묶어서 자세하게 알게 된 삶과 죽음, 변화된 심상에 대해 말한다. '키가 커간다'라는 느낌보다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넓어졌다'라고 느껴졌다. 가급적 문장이 아닌 문단으로 읽고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쉬지 않고 흐르는 윤슬처럼, 삶이 작은 부분 흘러가도 깊이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 저수지였다. 가둬놓은 물이 생각이었다. 멈추지 않는 자체로도 행복이었다. 진희와 이모, 그리고 읽은 독자인 나도 함께 시간을 삼키며 성숙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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