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1월8일_수요글방
할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던 아빠가, 30여년 전의 할아버지처럼 신학대학원에 간다고 했을 때 조금은 의아했다. 할아버지를 닮았지만 닮지 않았다고 말하던 아빠가 결국 할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일지 생각했다. 신학대학원에 가겠다는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아빠는 할아버지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아들을 라이벌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떤 포인트가?’ 싶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신학대학원에 들어간 아빠는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빠는 새로운 학문,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에게 금방 젖어 들었다. 집에서도 과제를 하기 바빴고, 밥을 먹을 땐 늘 학교 이야기를 했다. 괜찮아 보였다. 학교에서 만난 예비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 놓았다. 나쁘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 기억하는 아빠는 무엇엔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어디든 쉽게 마음을 열었다. 나는 그것이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잘 열지 않던 사람이 모두에게 쉬워지고, 마음을 잘 열던 사람이 쉬이 마음을 주지 않게 되는 것이, 그것이 곧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부턴가 아빠는 학교에서 만난 한 전도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다. 개인 과제를 할 때도, 조별 과제를 할 때도 생각이 비슷해 의견을 많이 나눈다고 했다. 공부를 하며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하루에도 쉴 새 없이 전도사와 통화를 했다.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아빠는 쉽게 마음을 여는 만큼 무서운 속도로 마음을 닫았다. 매일같이 입에 올리던 한 전도사에 대해 심한 욕을 하지 않았을 뿐, 뉘앙스로는 거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한 것과 다름 없었다. 길지 않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길에서 보면 한 판 크게 할 것만 같았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전도사와 같이 어느 마을의 기도원에도 다녀왔다고 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나’ 싶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신학대학원을 가겠다고 말을 할 때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공부를 할 때도, 학교에서 만난 예비 목회자들의 이야기로 식탁 위를 가득 채울 때도 난 아빠와 그 어떤 말도 생각도 나누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그로부터 몇 년 전,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아파트를 판 돈의 일부를 받아 어렵게 구한 월셋집의 작은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아빠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던 그날부터. 나는 아빠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의심하면서 미워해야 했다. 그것이, 할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받는 것이 미안해 집 근처 돈까스 가게와 만두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던 10여년 전 엄마를 지지해주는 일인 것 마냥,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다달이 내던 월세도 할아버지가 목돈으로 준 돈에서 나갔는데, 어느 샌가 아빠가 조금씩 빼서 쓰더니 월세를 낼 돈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땐, 할아버지처럼 살기 싫다던 아빠가 할아버지 반에 반만이라도 따라 살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집에서 멀지 않은 한 공장에서 플라스틱 통에 담긴 알약을 작은 상자에 넣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빠가 공부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식들에게 이것 저것 떼어 준 할아버지, 가난해질대로 가난해진 상황에 조금이라도 보태려던 엄마에게 이제는 조금 어엿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 속에 기대가 조금씩 피어 오르려 할 때면 오래 전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다정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하던 나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빠와 같이 학교를 다니는 찬양 전도사라던 그는 아빠의 말만 듣고 전 재산을 맡겼는데 전부 날리게 생겼다며, 가족들과 연락이 되느냐고 물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아니 그때의 아빠는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는지 엄마가 가끔 말을 해줬는데, 귀담아 듣지 않아 기억할 수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연락이 안 된 지 오래고 나도 모르니, 알게 되면 전도사님이 경찰에 신고를 하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드니 저 멀리 교회 지붕 위 십자가가 보였다. 목돈을 투자하면 돈을 불려주겠다고 말하던 사람이나 그 말을 듣고 전 재산을 가져온 사람이나, 신학대학원이 참 잘 돌아간다 생각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대상도 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빠를 미워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아빠에겐 미움이라는 감정을 쓸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니 그 화살이 한 때 예수, 하나님에게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문득 이 모든 것이, 사탄의 짓인가 싶었다. 아주 오래 전, 월셋집 작은 방의 꽉 닫힌 문 틈에서 새어 나온 것이 아빠의 목소리일까 사탄의 것이었을까.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머리가 아팠다.
글방에서 이 이야기를 쓸 때마다, 난 중간중간 쓰던 글을 멈춘다. 눈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이다 보면 어느 새 나온 눈물을 닦아 낸다. 감은 눈 앞엔 쉼 없이 일을 하느라 다 터 버린 엄마의 손, 그리고 휘어진 손톱이 그려진다.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의 손은 어땠을까 상상하면서, 난 앞으로 좀 더 바르게 정직하게, 부지런히 살아야겠다 다짐한다. 누군가는 K장녀가 가질 법한 콤플렉스라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이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