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쓸모
제주에 이사 온 첫 주에 엄마가 집에 놀러 왔다. 엄마와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예쁜 빌라를 둘러싼 담장 위에 크고 거친 껍질을 가진 노란 열매를 발견했다. 엄마는 그걸 보고 감탄했다. “어떻게 여기 이렇게 예쁜 열매가 올려져 있지?” 엄마는 한참 궁금해하며 모과인지 냄새도 맡아보고 껍질을 만져보기도 했다. 이후 비밀이 밝혀지기를 그 열매는 자몽이었다. 제주에는 자몽나무가 정원수로 심겨있기도 하다는 신비한 사실을 이후 알게 되었다.
풀이 가득한 길과 열매 하나에도 해맑게 웃고 있던 얼굴이었다. 난 언제나 엄마의 해맑음과 작은 것에 느끼는 기쁨들을 사랑했다.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담장의 바라봤다. 자몽은 언제나 그 자리에 올려져 있었다. 누군가 올려놓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도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볼 때마다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약간 걱정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몽글했다.
그러다 약 한 달이 지나니 예쁜 노란색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썩어 버렸다. 왠지 마음이 쓰였다. 그냥 떨어진 열매가 썩은 것뿐인데.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음에 누구도 저것을 필요하지 않았음에 괜히 아쉬웠다. 하지만 내게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저 몇 번 눈가에 치였을 뿐이다. 첫 이사 때를 생각하게 했을 뿐이다. 기뻐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을 뿐이다. 폭삭 썩고 나서야 정말 저 열매가 내게 쓸모가 없었던 것인지 되묻게 됐다.
내 인생에서 쓸모라는 것은 정말로 필수적으로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이었다. 특히 나 자신은 반드시 쓸모 있어야 했다. 쓸모 없어져서 누군가에게 내쳐지는 것을 나도 모르게 상상하고, 나도 모르게 겁에 떨었다. 그 작용은 내 몸속에 새겨진 것처럼 저절로 되었다. 하지만 담장의 열매처럼 쓸모없는 것이 마음에 들어올 때가 있고, 그것이 나를 추억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가치한 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은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그냥 마음에 들어오고, 예쁘다가, 어느 날은 거슬리고, 없어지면 걱정된다. 내 마음에 차지하는 공간이 많아진다. 내 마음속에서 땅을 따먹는다. 마음이 빼앗긴다.
새삼 ‘무가치한 것을 사랑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일 수 있겠다 싶다. 사랑하는 그 당장부터 가치는 생겨난다. 자몽은 썩어 없어졌어도 자몽이 있었던 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 순간의 따뜻한 햇살과 옅은 시트러스 향, 그리고 엄마의 웃음이 섞여 반짝이던 제주의 첫 순간들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으로 가치를 부어 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던 것들이 모두 썩어 없어지더라도, 그 순간이 짧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을 수 있는 그런 영원한 사랑을 하고 싶다. 제주 살이와 나의 30대를. 우리 할머니, 부모님, 아이들과의 시간, 집에 있는 아끼는 식탁과 소파를 쓰는 순간들, 그리고 딸이 애지중지 모아둔 돌멩이가 있는 마당까지. 영원히 사랑하려 한다. 쓸모와 상관없는 사랑의 쓸모를 증명해 내는 삶을 살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