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데도 자꾸 되새기는 이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상처 받은 마음에 대한 위로나 격려, 응원 같은 건 그때뿐인 것 같은데 왜 자꾸 찾으려 하고 들으려고 할까. 어차피 인생은 혼자인데 외부의 믿음이나 응원, 진심 같은 것이 나한테 진실로 중요한가?
그리고 그렇게 듣는 말들은 늘 비슷했다. 나 자신을 믿어라, 선택할 수 있다, 너는 존재로 소중하다,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 아름답다, 소소한 행복이 삶의 의미를 이룬다 등. 이러한 외부의 말과 지지가 그 당시엔 살아가는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헛헛하게 다가오며 어느 순간엔 이와 같은 응원이 그저 지겹기도 했다.
그럼에도 따뜻한 응원을 찾아다니는 나를 보며 어쩌면 그런 믿음이나 외부의 응원은 영혼이 마시는 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지속적으로 계속 들어야 건강한. 목이 마를 땐 너무나 단비 같기도, 마시고 싶지 않을 때는 억지로 마시는 것이 살짝 불쾌하기도 한 물. 그러나 어찌 되었든 외부에서 들어와 내 몸을 유지하는데 너무나 필요한 요소 같은 것. 물을 마시는 순간에만 목이 시원하고 따뜻함을 느끼는 것처럼 당시에만 마음이 괜찮아진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계속 내 안에서 돌며 어떤 상태를 유지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언가를 찾을 때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새롭게 알기 위해서’ 그리고 ‘확인하기 위해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은 후자에 해당한다.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며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확인하고 싶어서, 존재 자체를 긍정하고 싶어서, 지금까지의 믿음들이 위태로워서, 다시 재확인하고 싶어서, 찾는 응원과 격려의 글귀들.
그래서 명상이나 마음 수양하는 영상과 책을 찾는 이들은 그 안의 내용이 ‘이미 들어 다 알고 있는 것’이어도 상관없는 것일 테다. 그러한 글귀와 말과 분위기를 찾는 사람들은 어떤 엄청난 사실을 알려고 하기보단, 그저 그러한 쓰다듬이 필요해서이니까.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 잠시나마 있고 싶은 본능적인 찾음.
그런데 이러한 찾음(격려, 마음 수양 등)이 조급한 현대 사회 안에서 가끔 시간낭비나 감정 놀이로 취급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용성’이랑 멀어서 그런 걸까? 나도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고 느낄 때 위로와 애도의 시간은 쓸쓸함을 더하기만 하는 낭비의 시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마음을 쓰다듬는 시간이 당장 먹고사는데 필요한 실용적인 시간이 아닌 것 같아도, 인생을 길게 봤을 때 밥만큼이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꾸준한 운동이 건강을 위해 권장되는 것만큼이나 주기적으로 마음과 관련한 따뜻한 말을 보고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이지 않는 상처와 어떤 믿음, 성숙이 곧 자신의 몸과 가족, 사회에 천천히 그렇지만 분명히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이 미래의 자신을 떠올렸을 때,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상상한다면 더더욱 자신을 그러한 분위기에 자주 놓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이러한 모습을 꿈꾸기 때문에 자꾸만 상처 받은 마음, 위로와 격려에 눈과 손이 가고 몸과 마음이 향하는 것 같다. 삶을 물질 이상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어차피 아는 말과 행동이어도 자꾸만 되새기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