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ADA MOMENT_19.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았던 날의 기록

by 오하다 OH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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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ADA MOMENT_30.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았던 날의 기록

아침 7시

창밖으로 스며드는 빛이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겨우내 차가웠던 공기엔 봄의 기척이 희미하게 섞여 있고, 벽을 타고 내려오는 햇살은 생각보다 따뜻해서 그저 누운 채로 그 부드러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여본다.

평소 같으면 알람이 울리자마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겠지만, 지금 이 순간, 조금 더 느슨하게 솔직한 몸의 감각을 따라 하루를 천천히 열어보기로 한다.

일찍 일어나 서두르는 아침이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때론 침대에서 햇살을 느끼며 고요히 머무는 이 시간이 나에게 더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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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30분

거실 창문을 열자 봄기운이 흘러들어오고 그 바람을 따라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오늘은 커피를 조금 특별하게 내려 마시기로 한다.

버튼만 누르면 간단히 추출되는 캡슐 머신이 아니, 찬장 깊은 곳에 있던 낡은 드립포트를 꺼내 물을 천천히 부어본다. 김이 오르고 향이 퍼지고 유리잔 속 세상이 맑은 갈색으로 물드는 걸 보면서, 어떤 책의 글귀에서 보았던 ‘느림의 미학’ 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마시기 위한 커피는 10분이면 충분하지만, 즐기기 위한 커피를 위해 온전한 30분을 집중해본다. 이 의미 있는 순간이 빠른 시간 속에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가슴을 꽉 채울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오전 11시

해야 할 일들을 적어둔 메모장이 눈에 들어오지만, 오늘은 그 리스트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무엇을 먼저 해야 가장 효율적일까’ 가 아닌, ‘무엇부터 하고 싶은지’ 를 묻기로 한다.

급하게 처리하고 빠르게 결과를 내는 데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자주 중요한 것들을 놓쳐왔던 걸까.

효율을 기준으로 하루를 재단하지 않고,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먼저 손을 대고 있는 이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삶의 실루엣이 내 안에 또렷하게 자리잡아 형태를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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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봄을 머금은 햇살이 좋아서 잠깐 외출을 한다. 목적지 없는 산책이기에 그 순간이 더욱 의미 있고, 매 순간 마주하는 풍경은 평소보다 더 선명하다.

어느새 피기 시작한 벚꽃이 거리마다 연분홍색 자락을 드리우고, 담장 위로 머리를 내민 목련이 바람을 타고 천천히 흔들린다.

모두가 무언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길목에 멈춰 서서 그 효율적인 걸음들을 비효율적으로 바라본다.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봄의 언어를 오감을 통해 오롯이 느껴본다. 그렇게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이 시간 속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은 늘 느림 속에서 피어난다는 걸 깨닫는다.


저녁 6시

하루가 저문다.

계획했던 할 일을 모두 끝내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마음은 충만하다. 메모장에 빼곡한 계획 리스트가 애초에 정말 해야 할 일이긴 했을까? 나의 강박과 세상의 등 떠밈으로 인해 생긴 허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일이 아닌 오늘에 집중했던 하루. 나중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했던 찰나의 모든 시간들이 내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 생기 넘치는 삶의 줄기에서 선명한 이파리와 꽃이 피어나 내 머릿속을 밝혀주는 이 감각.

속도와 효율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이 감각의 증명이 주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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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평소와 달리 침대와 맞닿은 머릿속에 생각은 비어있고 감각만 존재한다. 밖은 아직 쌀쌀하지만 반대로 나의 내면은 포근하고 말랑거린다.

효율을 내려놓고 의미를 택했던 하루. 누구에게 자랑할만한 성과 하나 없는 이 하루의 기억을 가슴 속에 씨앗처럼 묻고 부드러운 흙으로 덮어본다.

천천히 살아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작은 씨앗. 그 느린 속도 속에서 비로소 나를 잃지 않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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