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
성장일기_일상
내가 담근 동치미한인 마켓에 한국무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재빠르게 움직여서 무 한 박스를 구입한다.
무 한 박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김치를 다 담근다. 깍두기, 동치미, 무생채, 단무지까지....
어릴 적 엄마가 하루 종일 총각김치, 배추김치, 열무김치와 수많은 반찬들을 한 날 담그시고
앓아누우신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왜 저 힘든 걸 하루 만에 하고 맨날 아프다고 하는 거지? 조금씩 나눠하면 될 텐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바보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살아왔고 그럴 거라
장담했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든 것은 오직 사랑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는 총각김치를 잘 먹고
누구는 배추김치를 잘 먹고
누구는 열무김치를 잘 먹고
누구는 진미채볶음을 잘 먹는다.
딸이 넷인 엄마는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엄마가 아니었지만, 사랑한다는 말대신 음식으로 그 표현을 대신했던 것 같다. 우리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도 행복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우리 집은 외식을 자주 하는 집이 아니었다.
특별한 날에만 동네 유명한 갈빗집을 가거나 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는 것이 외식의 전부였다.
간혹 우리가 짜장면 먹고 싶다고 말하면 대신 짜파게티를 끓여 주셨고, 라면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
대신 잔치국수를 삶아주셨다.
외식이 하고 싶으면 엄마가 그냥 만들어주겠다 하셨다.
어린 시절 나는 생각했다.
'엄마는 돈 쓰는 게 아깝거나 내 말을 들어주기 싫어하는구나.'
매 순간 모진 말과 냉정함으로 내가 하는 요청을 거절하셨던 엄마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엄마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 가기 시작한다.
엄마는 우리가 먹고 싶다는 것을 사주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깨끗하고 좋은 것을 먹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이 좋아서 단무지, 동치미, 깍두기를 한 날에 담가 팔목이 아파서 김치 담기를 끝내고 소파에서 쉬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팔목 너무 아파 며칠 째 파스를 붙이면서도 바닥을 보이는 동치미를 보니
'내일 또 동치미 담거야겠다.'라는 혼잣말을 하고 있다.
이제야 조금 깨닫게 된 의 마음. 그저 미안할 뿐이다.
엄마도 누군가의 아내가 처음이었고, 엄마가 처음이었고, 며느리가 처음이었고, 할머니가 처음이었을 텐데
주말마다 울리는 엄마의 페이스톡
늘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영상 전화를 켜면 40대 후반일 딸에게 여전히 잔소리 폭탄을 날리시는 엄마.
'날 좀 내버려 두지! 그만할 때도 되었는데...'라는 생각에 빠진다.
"얼굴이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라고 말하시는 엄마의 한마디 한마디를 불필요한 참견이라 생각했다.
엄마와 통화가 길어지면 질수록 내 마음의 삐딱이는 엄마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작정을 하며 묻는다.
"어릴 때 우리한테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고 매 순간 강하게 매정한 잔소리를 많이 했어?
"사회에 나가면 험한 꼴이 많으니까. 누군가에게 험한 소리 듣고도 상처받지 말고 강해지라고..."
"그니까. 사회가 그렇게 냉정한데 엄마라도 따뜻했어야지!"
한참을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말했다.
"그때는 나도 몰랐지. 어느 누구 하나 가르쳐 준사람이 없었거든. 나도 내 어머니한테 그렇게 듣고 자랐고, 그게 너희들을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바닥이 보이는 동치미를 들여다보며 갑자기 엄마가 떠오른다.
통화를 하다 보면 자꾸 엄마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 게 다반사지만 평소에 엄마를 생각하면 매 순간 그리운 것은 무슨 마음일까?
나도 모르겠다.
우리 관계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싶다.
미안함과 미움의 중간 어디쯤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