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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ara Dec 14. 2023

#3. 딸에게 아버지란?

성장일기 _ 일상

며칠 전에 아버지 생신이셔서 한국과 시간 맞춰 영상통화를 했다. 늘 그렇듯 42년생 아버지의 따뜻하지만 서툰 애정표현과 눈빛.  딸이 손자 손녀가 많이 보고 싶으셨으면서 할 말 없다며  엄마에게 전화기를 넘기신다.  엄마랑 내가 통화를 하고 있으면 귀를 쫑긋 세우고 모녀가 무슨 내용으로 수다를 떠는지 옆에서 다 엿듣고 계시면서 엄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추임새를 넣으신다.


'그럴 거면 직접 통화하시지...'


그걸 눈치챈 나는 엄마랑 통화하다 말고 다시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 달라며 아버지를 바꿔 달라 말한다.

어색한 말투로 전화를 넘겨받은 아버지는


"엄마랑 통화하지 뭘 또 통화하러...."


머쓱한 듯 말씀하시며 어색한 표정과  짠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얼굴이 푸석하다?"

"어... 잠을 좀 못 자서 그래."

 

딸과 좀 더 긴 대화를 하고 싶지만 아버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곁에서 얘기들 듣기는 하셨지만 별말씀은 안 하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가깝지만 늘 멀었고, 냉정한 듯했지만 너무 따듯했다. 퇴근길에 사 오시던 셈베과자는 언제나 기다려지는 간식이었다. 저녁밥을 먹고서 TV앞에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과자를 오물오물 먹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한쪽몽글몽글 따뜻해진다.


 어릴 적 아버지와 참 많은 곳을 다녔다.

지금이야 주 5일 근무제이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주 6일 근무가 기본이던 시절이었기에 피곤할 법도 한 일요일 아침인데 5시 30분 기상 9시 취침 일상이었던 아버지는 일요아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카메라를 챙겨서 우리와 함께 어린이회관극장, 한강 스케이트장,  KBS홀, 국립박물관, 과학박람회, 어린이대공원, 독립기념관, 올림픽공원, 스케이트장, 수영장 등등 주말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갔어야 했다. 그때는 이유도 모르면서 무조건 따라다녔다.


어린이회관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 우뢰매시리즈, 만화영화, 외화 등등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풍요로운 시간들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실 그 지루한 어린이영화도 아빠는 늘 함께 봐주셨다. 알게 모르게 아버지와 함께 다니며 봐왔던 영화관에서의 기억들이 좋은 인상으로 각인되어서 인지 나 역시도  아이들과 함께 애니메이션이나 아동극을 관람하며 웃고 울었다.

사실 내가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모범 가장적 행동들은 자발적인 것이 이니라  엄마가 시켜 한 행동이라는 엄마의 말씀.


맞다. 내 즐거웠던 유년기는 50%는 엄마의 몫이 확실하다. 그런데 누가 시킨다고 그 말을  잘 따라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니 50%는 아버지의 몫이 확실했다. 누구의 기획의 도였건 간에 나와 우리 자매들에게는 감사하고 축복받은 유년시절이었음은 분명하다.


다만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어야 할 때마다,


  “야야. 똑 바로서. 여기 봐. 하나 둘 셋”


마치 행사를 마치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기계적 미소와  포즈를 취하며 찍어대는 사진이 그때는 너무 싫었다. 조금은 귀찮았다.


지금은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이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지낼 수 있던 것이 축복이란 걸 안다.


 한 번은 KBS홀 견학을 가게 되었는데  동생이 택시에서 그만 구토를 하고 말았다.  택시 기사분은 운행 중에 아이가구토를 해서  화를 엄청 내셨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미안해하셨지만 나중에는 기사분이

지나치게 큰소리로 소리치시니 아버지마저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셨다.


 “아니 애가 토 한 거 가지고 뭘 그러냐고. 치우면 되지 않냐고.."


라고 큰소리치시면서  열심히 휴지로 토한 걸 닦고 계셨다.  맨손으로...


 그 후 아버지는 택시기사분께 더 이상 사과하지 않으셨다. 택시 청소를  마치시고는 되려 성질을 내셨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도 딸들에게 소리 지른 지 않는데 기사분이 애들이 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딸에게 지나치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에 무지하게 화가 났던 것이다.


사실 아버지 성격상 남에게 피해 주는걸 극도로 싫어하시던 이지만 딸이 울고 있는데 그런 아이에게 타인이 소리소리를 지르는 것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 싶다.


 사실 그날의 그  기억은 참 공포의 순간이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되려 따뜻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우리의 편이 되어주시는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아버지는 늘 본인의 건강을 자랑하시며, 100살까지 살아서 손자손녀 결혼식까지 가신다고 호언장담 하신다. 그렇게 자신의 건강을 지키시며 늘 옆에 계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매일매일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보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쉽게 하기는 어렵다.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하면 엄마 아버지가 더 가슴 아파하실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받은 아버지가 주신 무거웠지만 포근했던 사랑이 인생을 살아가는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살아가다 종종 만나는 어려운 일들 속에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오늘따라 많이 보고 싶어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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