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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ara Dec 16. 2023

#4. 엄마라는 이름의 다른 말 똥고집

성장일기 _ 일상

딸이 눈다래끼가 심해졌서 병원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캐나다는 웬만해서는 항생제 처방을 잘 안 해준다.  한국적 마인드로는 항생제를 먹어야 할 것 같은 눈이었지만 캐나다 의사 선생님은 눈을 잘 닦으라며 약품이 묻은 티슈처방과 온찜질을 잘하라며 찜질용 안대 처방해 주셨다.  며칠 만에 다시 더 큰 눈다래끼가 또 생겨버렸기에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약 좀 보내줘요. 다른 거 필요 없고 그냥 약만 보내줘요.  다른 먹을 거는 보내지 말고요.  친구들 한국 가서 나눠 먹을 사람도 없고, 정 뭐 보내고 싶으면 조미김 직접 구운 거 2팩만 보내줘요."


엄마의 성격을 아는지라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정말 내가 필요한 것만 딱 보내달라고 말했다. 다음날 엄마에게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박스가 남아서 과자 몇 개 넣어 보냈다."


국제우편 박스로 작은 약상자들과 김만 받고 싶었다. 엄마의 좋은 의도는 잘 알면서도 손자, 손녀에게 주려고 일부러 과자를 너무 많이 사서 큰 박스를 사야 했던 것인지 아님 처음부터 작정하고 큰 박스 산 것인지 나는 후자에 한 표를 던진다. 


일주일 후 택배가 도착하였다. 국제우편 박스 중 가장 큰 박스가 도착하였고, 필요했던 약봉지는 찾기 위해서 상자 맨 위부터 쌓여 있는 것들을 하나 둘 밖으로 꺼내었다.


             마이쭈, 고소미, 자색고구마튀김, 검정콩 튀김, 검정깨강장, 조미김, 북어, 청포도사탕
             생강젤리..................... 그리고 눈다래끼 약봉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택배 잘 도착했어!"

"어. 빨리 들어갔네!"

"응. 이번에는 빨리 왔어!"

"아니 근데 뭘 이렇게 많이 보냈어! 누가 다 먹냐고요.  지금이 6.25시 절도 아니고 캐나다에 다 있어. 그리고 전에도 말했잖아. 친한 친구들 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나눠 줄 사람도 없는데 그래서 아무것도 보내지 말라고 한 건데.."


라며 또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은 엄마에게 타박 섞인 원망과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남의 말 진짜 안 들어. 정말로..”


 전화를 끊고 하염없이 택배박스를 바라본다.


 ‘아이 정말 지겹다.  이 싸움...’


엄마에게 짜증이 난 마음으로 일주일이 흘렀을까? 중학교 친구와 고등학교 친구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 친구의 어머니가 내 엄마와 동갑이셨다.


내 부모님이 연세에 비해 너무 정정하시고 건강하셔서 나는 항상 내 곁에 건강히 계실 거라고 믿고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나니 부모님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되셨구나 라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괜한 죄책감과 울적한 마음에 막냇동생과 통화를 하며 하소연을 하였다. 오래간만에 긴 이야기 하다가 코로나 때 동생이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당시 동생이 기침감기로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는데 어디에서도 동생을 받아주지도 않자 이 소식을 들은 엄마가 동생이 사는 거주지 보건소에 30번 넘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30번 만에 겨우 연락이 되어 내 딸 살려달라고 호소와 호소 끝에 가까운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잠시 치료하였으나 그 당시 코로나 테스트 결과 음성상태여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동생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져서  거주지 동네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여 xx병원 응급실 향하게 되었다. 도착하자 코로나 테스트를 하였는데 양성이 나온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동생이 도착한  xx병원 응급실에서 기겁을 하며(당시 상황상 이해는 하지만) 병원밖에서 대기하라고 하며 길바닥에 앉아 있는 상태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좀비에게 물린 사람을 일반인으로부터 격리시켜야만 하는 의료진과 좀비에게 물린 자를 대하는 태도랄까?  동생은 몸 상태가 최악인 채로 그 추운 날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아는 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자 고립되어 너무 무섭고  슬펐지만 울 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일어 설 기운도 움직일 기운도 없는 동생은 병원 밖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병원 측은 그녀를 그대로 계속 두었던 것이다.

사실 엄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막내 동생은 엄마에게 병원으로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병원으로 온 것이었는데  그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는 응급실로 향하였고, 그 추운 날 응급실 밖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딸을 멀리서 바라보며 엄마는 너무 놀라고 마음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고 후일에 동생에게 말했었다고 했다.


진격의 엄마는 그곳을 지키는 경호원 불렀다.


"아니 저기요.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은 추운데 왜 저러고 있어요? 너무 춥겠어요. 율무차나 담요라도 가져다줘요"라고 말했다.


엄마는 경호원에게 끊임없이 말하는데 그가 말을 듣지 않자


" 아니.. 내 딸이요 내 딸이라고요. 저러다 죽는다고요. 죽어"


라고 말을 하며 울기 시작하니 엄마 손에 들려 있던  율무차와 담요를 동생에게 전해 주었다고, 동생이 오들오들 떨고 있던 그 2시 반 동안 엄마 역시 응급실 밖 길바닥에서 그대로 서서 동생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동생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코로나로 딸을 잃을까 봐 두려웠을까? 아니면 엄마가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서 슬펐을까?


엄마는 그냥 딸 옆에 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늘 딸들 말을 듣지 않으니까! 엄마의 다른 이름은 똥고집이다.


그렇게 동생에게 전화기 너머로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간 엄마를 향한 짜증과 서운함은 온데간데 사리지고 그리움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멈춰지지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내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딸이 방으로 들어와 혼자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서 묻는다. 아이에게 막내이모와 통화하던 내용을 설명해 주었더니


  "엄마! 울고 싶음 울어도 돼. 실컷 울어. "


라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늘 고맙고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딸을 하느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을 만큼 은혜로운 날이 종종 있었는데, 오늘이 그런 날 중 가장 으뜸인 날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 서러운 눈물을 흘리다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뻐근하다. 거울을 속 내 얼굴은 퍼그의 찌그러진 얼굴이다. 쌍꺼풀과 얼굴이 10배가 부풀어 있다.


한국에서 생활할 때 울고 싶어도 실컷 울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해야 했고 내가 운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신기하게도 캐나다에서 울음이라는 것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웠다.  내일을 걱정을 덜하고 맘껏 울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으면 안 만나도 되고, 대부분 나를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어서 띵띵 부은 얼굴로 어디든 다 갈 수 있었다. 나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어쩜 그것이 해외살이의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느끼는 외로움 속에 자유로움


그러나 당분간 울면 안 될 거 같다. 한번 터져버린 수도꼭지가 제어가 안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간간히 친정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다 보면 엄마의 잔소리가 길어져 나의 칼 같은 말대답으로  대화는 끝나고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기 일 수였다. 


사실 엄마의 말이 100% 옳기 때문에 더 화가 난다.  엄마의 말은 늘 정답이지만, 그 말에는 날카로운 송곳 같아서 내 마음을 후벼 판다.  나는 성장하는 내내 엄마의 말을 가장 잘 듣는 딸이었는데, 마흔 살에 제2의 사춘기 맞이하였고 내가 그 어린 시절 못했던 질풍노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말에 따박따박 반박하고 반항을 일삼는데 수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지만, 엄마 날카로운 말은 언제나 매번 정확히 옳았다.


옳은 말도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듣는 이에게는 그냥 소음을 뿐이다.  적어도 나에게 엄마의 말이 그랬다. 칼 같았다. 


오늘 사춘기 딸이 나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낸다.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참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내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 그리운데 엄마랑 통화를 하면 어김없이 30초 만에 화가 나서,  내 안에 15살 소녀는 여전히 반항기로 가득 차 있는 상태로 변하여 엄마에게 폭풍반항을 날린다. 


 나는 내 아이들의 엄마이고, 내 부모의 딸이며 사춘기 딸을 두고 있다. 그리고 제2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엄마가 필요하다.  

그냥 내 이유 없는 화를 받아줄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엄마에게 완전하게 독립하지 못하였기에 여전히 엄마 옆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늘 엄마의 똥고집을 비난하면서 내가 부리는 엄마를 향한 똥고집 바라보면서 엄마를 닮아가는 모습에 흠칫 놀란다.


그래서 엄마라는 이름의 다름 말은 똥고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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