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부터 지킬 앤 하이드

유전적, 기질적 요인

by 오하루



나의 조울증은 태어날 때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아니, 좀 과장해서 나는 '태생부터 지킬 앤 하이드'였다.


조울증의 원인은 다양해서 모두 밝혀지진 않았지만, 내 경우를 쭉 살펴볼 때 크게 '유전적, 기질적, 환경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신체 질환에 가족력이 있는 것처럼 정신 질환에도 유전적이 요인이 있다. 특히 조울증은 유전적인 요인이 다른 정신 질환보다 크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지만 부모가 조울증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녀가 조울증에 걸렸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 '유전적'이라는 의미는 조상이나 친척의 누군가가 조울증이었다면 후대에도 발병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할머니는 나와 정말 비슷하신 분이셨다. 사교적이고 일도 잘 벌렸으며 자기중심적이고 예체능에 능했다. 우리 아빠는 기타도 잘 치시고 노래도 잘 부르신다. 머리는 똑똑하시고 계획적이며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도 있으시다. 우리 엄마는 감성적이고 희생적인 분이신데, 과거 상처와 시집살이(?)로 인해 우울감이 깊은 상태에 오래 머무르셨다.


이걸 종합해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나'이다. 이건 뭐, 짬뽕도 아니고 참 일관성이 없지 않은가. 이성적인데 감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인데 희생적이고, 예술적 재능과 흥이 끓어 넘치는데 우울감은 땅 파고 내려가다 못해 두더지랑 친구 할 정도다.


그런데 이런 유전자를 받은 것이 나뿐이겠는가. 언니도 있고 남동생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울증이 발병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유전적이 요인이 100%가 아니며 이 둘과는 다른 '나만의 원인'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생각하는 다른 요인은 '기질'이다. 기질은 타고난 성질로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베이스로 깔려있는 성향이다. '히포크라테스 기질 테스트'를 통해 자신이 어떤 기질인지 알 수 있는데, 2018년 배우 신애라가 TV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출연해 소개하며 한참 유행을 탔다. 그때 너도나도 그 테스트를 했고 그중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질은 다혈/담즙/우울/점액으로 나뉜다. 테스트 결과, 점수가 높은 2개가 자신의 주기질과 부기질이 된다. 짧게 표현하자면 아래와 같다.


- 대중적 다혈질 : 웅변적, 외향적, 낙천적
- 역동적 담즙질 : 행동가, 외향적, 낙천적
- 완벽주의 우울질 : 사색가, 내성적, 비관적
- 평온한 점액질 : 관찰자, 내성적, 비관적


내 결과는 다혈/우울질. 주기질은 다혈질이고 부기질은 우울질이다. 극과 극. 정반대. 흔히 나오는 조합도 아닐뿐더러 '가장 건강하지 못한 조합,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사는 경우가 많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나는 이 결과를 보고 다시 테스트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빼도 박도 못하게 나는 다혈/우울질이었다. 정말 난 태생부터 양극단! 조울증의 또 다른 병명인 양극성 장애를 타고 난 셈이다.


이렇다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50명 넘는 어른들 앞에서 남행열차를 신나게 부르는 반면, 부모님 앞에서는 어린이처럼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다. 호기심 천국이라 빨빨거리고 쾌활하게 돌아다니는 것과 달리 친구 없이 혼자 지낸 적이 더 많다. 욕심도 있고 자존심은 죽어라 센데, 시험 망쳤을 땐 부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울었다. 이러니 나 스스로를 정의하기 굉장히 힘들었고, 대한민국 입시 전쟁 안에서 사춘기 시절 자아 정의의 기회도 놓쳐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나를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가장 서러운 부분이 무엇일까 떠올리게 됐다. 그때 머리에 가득 찬 한 단어는 '예술'이었다. 다혈질의 특징은 창의적이고 무대체질이다. 우울질은 예술적이고 심미안이 있다. 이 둘이 만난 나와 같은 사람은 예술을 해야 행복한 기질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술을 할 수 없는 주위 환경 탓에 꿈을 제대로 얘기하지도 못했다.


태생적 기질이 지킬 앤 하이드처럼 불안한 양극단인데다 내 자신이 이상적인 꿈과 너무나도 먼, 평범한 여학생이라는 사실은 우울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거기에 자책감과 원망이 더해졌다. 가족이나 환경적 조건이 받쳐주지 않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간절하게 노력했다면 예술가의 꿈을 이뤘을 거라고 말이다.


나이 서른한 살. 시간 속에서 무뎌진 나의 재능이 너무나 안타까워 지금도 눈물이 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어린날들이 야속해서 마음이 쓰라린다. 그리고 나의 예술적 감각을 알아봐 주고 키워주지 못한 부모에 대한 원망. 이 모든 것이 혼재되어 영혼이 구천을 떠돌 듯, 예술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내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고 예술에 목매달았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종합 예술인이나 뮤지컬 배우가 되어 있지 않을까.'

'행복하게 덕업 일치를 이루진 않았을까?'


이 상처. 사그라들지 않는 미련한 미련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시작한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나를 병들게 했다. 어쩌면 나는 고통과 상실감이 너무나 커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패로 조증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의 조울증은 지킬 앤 하이드였던 태생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것들로 발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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