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인정하기까지
"우리 딸이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엄마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조울증 치료를 받은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엄마는 대뜸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치료받은 지 꽤 됐는데, 이제야 인정을 한다고? 한 달 동안 매일 같이 통화하며 하루가 어땠는지 나누고, 메시지로 기분을 재차 묻고, 함께 기도까지 했으면서... 이제야 인정한다고?!'
본의 아니게 한 달간 엄마를 괴롭힌 것 같아 마음이 영 불편했다. 죄짓는 찝찝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그동안 인정하지 못했다면 나에게 했던 숱한 위로의 말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까?
그러다 문득 내가 엄마를 너무 야박하게 대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의 딸이 조울증 판정을 받고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모에게 정말 크나큰 충격이었을 거다. 죄책감과 책임감,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가 밀려왔겠지.
뱃속에 이 아이를 처음 느꼈을 때,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이 준 마음의 아픔들.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했던 무관심. 안타깝게 놓친 보호가 필요했던 순간, 마음껏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지 못했던 딸의 꿈들.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미안해서.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해서. 어쩌면 딸의 조울증 증상을 인정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엄마는 딸의 조울증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싸 안아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가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가 정신적인 질환을 가지고 있다면 겉으로 '괜찮아 같이 이겨내자.'라고 응원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 마음으로 그걸 받아 드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특히 가족이라면 그 정신적 질환을 가지게 된 데에 내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 임을 알기에.
엄마와 통화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캄캄한 방에 은은한 수면등을 보다가 빠르게 생각에 잠겼다.
'엄마는 한 달이 걸렸는데, 나는? 정작 내가 조울증 환자라는 사실을 정말로 인정했나?'
나는 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신이 났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 시트콤 같은 인생을 살았는데, 그 이유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갈팡질팡하면서 자리잡지 못했던 이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많은 사건들이 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리고 또 하나. 원치 않게 주변 사람과 상황에 휩쓸리며 받았던 상처의 증거. 조울증은 그 증거였다.
즐겁고 들떴고 흥분됐다. 이걸 치료하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에 가까워질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두통과 매스꺼움이 동반되었고, 하루는 너무 구토 증세가 심해져 노란 위산을 쏟아내고 회사를 쉬어야 했다. 새벽에 문득문득 잠이 깨고, 잠이 깨고 나면 갑자기 심장이 빨라지면서 호흡 곤란과 공황 증세가 나타났다.
이상했다. 조울증 환자인지 모르고 살았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넘겼던 것들도, 조울증이라는 타이틀이 붙고 나니 더욱 예민하게 다가왔다. 조울증에 대한 지식과 증상, 약의 부작용을 직접 경험하니 내가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나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걸릴까? 6개월 1년? 아니면, 내가 30년을 살았으니 그 정도 걸리까? 너무 긴데..' 이렇게 두려움이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 회피하게 되었다. '조울증이 아닌 건 아닐까? 그냥 좀 감정 기복이 심한 건 아닐까? 공황 장애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서, 두려운 꿈을 꿔서 심장이 빨리 뛰는 건 아닐까? 이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 상처로 힘든 것뿐이지 않을까?'
엄마가 자신의 딸이 공황장애를 가진 조울증 환자인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는데 한 달이 걸렸다. 하지만 정작 나는 너무 가볍게, 또는 회피하면서 환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 인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당당하게 인정하는 것. 그것부터가 치료의 시작인 것을. 엄마의 말을 통해 깨달았다.
"저는 조울증 환자입니다. 제2양극성 장애, 공황장애, 폭식증, 강박증, 자살충동 증상이 있습니다. 과도하게 흥분해서 목소리가 쩌렁쩌렁해지고 방방 뛰며 갑자기 춤을 출 때도 있지만, 극도로 섬세해서 작은 일에도 크게 상처를 받고 우울해합니다. 특히 누군가 내 흥분 상태를 잠재우려 하면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수치스러워합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10분, 50분간 상담치료를 받습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 1시 20분, 20분 간 정신과 진료를 받습니다. 매일 밤 9시에는 정신과 약인 가스몬정 1알, 에스시탈로프람정 10mg, 아빌리파이정 2mg, 자나팜정 0.25mg, 코팩사엑스알서방캡슐 75mg을 먹습니다. 앞으로 약은 더 늘어날 거라고 합니다.
어느 날은 텐션이 정말 좋아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일에서 성과를 아주 잘 냅니다. 동료들과 가족들과 깔깔거리고 웃으며 대화를 합니다. 그러나 또 며칠 뒤에는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침체되고,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에 불안해서 가슴을 치며 웁니다. 이런 시기에는 업무에 집중이 안돼서 회사에 있는 8시간이 곤욕이지요.
주말에는 하루 종일 유튜브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배달음식으로 배를 빵빵하게 채우다가 B마트에서 과자를 3만 원 치 시켜 입으로 욱여넣고, 위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잠이 듭니다. 친구나 지인과의 약속에 나갈 때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듯 화려하게 꾸미고 갑니다. '나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 행복해!'라고 외치듯 말이죠.
이렇게 조증과 울증을 반복하는 삶. 그 바탕에 불안과 두려움이 베이스로 깔려있는 삶. 마음에 평화가 깨져 궁극적으로 삶을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불행한 삶. 저는 지금, 그런 일상을 살고 있는 조울증 환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