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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Jan 06. 2017

시간 너머로부터

마음을 쉬다...


주말이다. 불쑥 찾아드는 생각에 홀린 듯 집을 나선다. 종일 소일할 수 있는 읽을거리와 소소한 간식을 챙겨 근처 고찰을 향한다. 오늘 꼭 하고 싶은 게 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계획과 방법이 없는 것 자체가 계획과 방법이 될 거라 믿는다. 

시끄러운 세상을 매표소에 묶어 놓고 산문에 들어선다. 산이 아님에도 나무들이 울창하다. 고찰의 힘이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힘이다. '새 것'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잔잔하지만 웅장한 힘이다. 그 힘은 이렇게 나무에도 실려 있다. 주차를 하고 개울을 따라 걷는다. 전에 가지 못한 작은 길들을 하나하나 되새긴다. 왜 여길 오려했는지 점점 관심에서 멀어지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오늘은 무계획의 계획 아니었던가. 이제 그 무계획의 계획조차 저 너머로 사라진다.

여기는 오랜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건물들이 많다. 현판도, 한때는 고왔을 단청도 바람에 닦이고 비에 녹아 색이 바랬다. 그 앞에 선다. 기둥도 문짝마저도 하얗게 바랬다. 탑도 모서리가 닳아 둥그스름해졌다. 세월의 흔적이다. 긴긴 세월이 다녀간 흔적이다. 이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고 울었을까... 지금 내가 웃는다고 그 웃음이 영원할 것도 아니요, 지금 내가 운다고 그 울음이 영원할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다. 


금강계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부처님 앞에 예의 바른 행동에 목숨 걸듯 챙기시던 보살님들이 떠오른다. 입가에 웃음이 뜨는 걸 느끼며 양말을 신어도 발이 시리다. 저물어 가는 하루의 끝자락이라 바닥이 차갑지만 차가우면 차가운대로... 삼보일배를 하는 이도 있고 눈물을 보이는 이도 있다. 걸어가는 모습에서 각각의 스토리가 보인다. 경건하게 탑을 도는 신도들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하얀 화강암을 따라 걷다 탑이 나타나면 절을 하고 다시 걷다 절을 하고... 절을 하고 고개를 들면 그때마다 풍경이 달라져 있다. 적송이 모여 선 곳도 있고 푸른 하늘 흰 구름 아래 아담한 산이 놓여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한 곳에서는 寂滅 적멸이 유난히 눈을 파고든다. 고요하여 모든 것이 멸한 곳...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드니 무언가 멈춘다. 갑자기 거대한 소용돌이가 멈추고 관성에 실려 있던 내가 튕겨져 나간다. 소리와 중력이 사라진 곳... 그제서야 알아챈다. 아... 내가 소용돌이 속에 실려 있었구나... 소용돌이 속에 있으면서도 소용돌이 속에 있는 걸 모르고 있었구나. 


갑자기 편안해진다.
모든 것이 천천하다. 

어딜 그리 바삐 가고 있었던 걸까... 일이 있으면 일을 하면 되는 건데 왜 그리 바빴을까... 그 바쁜 마음이 오히려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일을 시작하면 마음은 이미 일을 언제까지 혹은 어디까지 끝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소용돌이 속이었다. 

내가 만든 소용돌이... 


바람 소리와 소복소복  발자국 소리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한 길을 걷다. 



行亦禪  坐亦禪 語黙動靜 體安然據此 亦通四儀耳

행역선   좌역선  어묵동정  제안역거차  역통사의이 


"걸을 때나 앉을 때나 선정 속의 삶,

 어묵동정 그 바탕은 편안한 마음"

  -증도가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모든 곳에 한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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