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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Dec 06. 2016

어떤 인연...

함께 숨 쉬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세상을 사는 살아있는 사람을 원한다.

11월 가을에 찾아온 

청정한 인연을 따를 때...


     

늦은 밤 전화가 울린다. 아버님을 모신 요양원 원장님이다. 남편이 한참 통화 끝에 고운 한복 한 벌과 영정사진을 가지고 오라셨단다. 그래도 설마 했다. 이러다 다시 좋아지실 거야. 다시 좋아지실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아직 해 드리지 못한 일이 너무 많다. 그분과 난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가깝다면 가깝지만 실지로는 가장 어려운 관계이다. 이대로 보내기에는 내가 그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당최 없다. 하지만 아버님은 정말로 가시는 길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데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뭐가 미안한지 모르는 것도 미안하고 그저 미안하고 미안했다.

그랬다. 그분과 난 단지 의무적이고 의례적인 관계였다. 결혼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지만 평소 친할 일도, 애틋한 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랬던 아버님이 석 달여의 병환 끝에 돌아가셨다. 끝을 몰랐기에 유난히 길었던 석 달이었다. 길다고 느꼈던 그 짧은 시간이 미안하다. 지나고 나니 그냥 할 걸... 좀 더 잘 할 걸... 후회만 남는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미안하던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한 구석에 모아놓은 소책자가 눈에 띈다. 아버님 49재 때 보시하고 남은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아버님이 생전에 늘 독경하시던 경전이다. “이건 돈 되는 경전이야,” 하시면서. 미국서도 읽어본 적은 있다. 생각나는 건 이 경의 한 구절을 일러 주는 공덕이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크다는 정도... 그 칠보의 사이즈에 놀라 기절한 기억은 있다. 강가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세계 어쩌고 하는데 그 모래알이 여러 번 등장하면서 그만한 양의 칠보로 보시해도 이 경전의 한 구절의 힘이 더 크다 그랬지. 그런데 막상 그 구절이 뭐였는지, 무슨 뜻이었는지는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다.

방을 둘러보니 마침 세간에 잘 알려진 스님들 이름이 붙은 금강경 해설이 두어 권 책장에 꽂혀 있다. 내가 사다 놓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일화 위주의 책도 재미있고 대학 철학서처럼 써진 책도 그럴듯하다. 하지만...... 일화들도 다 재미지고 개념 설명도 친절했는데 책을 덮으니 기억이 안 난다. 검색 시작. 역시 엄청나게 뜬다. 그중 제일 눈에 띄는 건 옛날 스님들 여섯 분이 쓰신 금강경을 통으로 해설해 놓은 책이다. 양이 뭔가를 말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많은 양을 소화한다는 건 일반적인 자신감으로는 불가능하다. 도인이거나 바보 거나. 왠지 구름 위에 올라가 계신 분일 것 같다. 더구나 다른 책들도 많이 내셨군.

하지만 막상 골라 놓고도 쉽지가 않았다. 책이란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그 옆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봐 가면서 고르는 게 맛지다. 그래서 웬만하면 굳이 시간을 내서 책방을 찾는다. 다 못 읽을 거 뻔히 알면서도 일단 사고 본다. 지금 안 읽어도 언젠가 읽을 수 있어. 그렇게 사다 놓은 것 중에 저 금강경 두 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교보문고에 물어보니 재고가 없단다. 한 권 한 권 인터넷으로 주문해야 한단다. 흠.. 그건 좀...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그 스님 계시다는 전라도 모처 큰 절의 서점에 전화를 했다. 책 사러 전라도까지? 정말 엄청난 발심이군. 그래도 혹시 알어? 봄꽃은 이미 다 졌지만 단풍구경을 그리로 갈 수 있을지... 또 혹시 알어? 그 스님 계시는 절인데 오다가다 만날 수도 있을지... 다행히 책들이 모두 있단다. 그래, 언젠가 간다. 이제 모든 촉수를 전라도로...



기회는 찾아왔다. 산과 들이 온 세상을 뒤집어 놓을 듯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갈 때 전라도 송광사를 찾았다. 포장 안 된 산길. 요즘 세상에 길 포장하는 것이 일이기나 하겠냐마는 그런 문명의 이기보다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고집이고 하나의 울림이다. 흙냄새를 맡으며 올라가니 말로만 듣던 편백나무. 죽죽 뻗은 모습에 눈도 마음도 시원해진다.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막상 나무 밑에 서니 나무들의 군락이 꽤 넓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숲이다.

2016.11월 가을 송광사 낙엽....움직이면서도 고요한 것 같고, 가면서도 머무는 것 같다. 


불일서적 

찻집을 지나 불일 서적. 무소유의 스님이 지내시던 암자 이름을 땄나 보다. 어딘가 살짝 균형을 벗어나 있는 듯 한 퉁명스러운 글씨, 그 질박함과 우직함으로 참 오랜 세월을 견뎌 왔겠구나 싶은, 뭔가 조용한 힘이 느껴지는 한옥이다. 그 세월들이 좋기만 했겠냐마는 묵묵히 견뎌온 힘 앞에선 모든 것이 ‘시간’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새 건물들은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하는 ‘시간의 힘’이다. 그 시간이 만들어 낸 공간에선 왠지 모든 것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있을 것 같다. 그 옆의 연못 위로 늘어진 나무들도 멋스럽다.


책을 몇 권 뽑아 들고 계산대 앞으로 갔다. 웬 스님이 한분 들어오셔서 계산대 직원 분이랑 말씀을 나누고 나가신다. 직원 분이 내가 가져온 책을 보시더니 “어, 이 책 지금 저 스님이 쓰신 책이에요.” 혹시나 했던 생각이 막상 눈앞에 벌어지니 오히려 당황스럽다. 지금 나가신 스님을 붙들고 뭐라도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 불교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로서는 물어볼 게 없다. 저 멀리 가시는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있다. 그런데 웬걸! 발걸음을 돌려 이쪽으로 돌아오신다. 용무가 남으셨나 보다. 더 당황스럽다. 이젠 정말 뭔가 여쭤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혼자서는 무모하나 사람에게는 용기가 안 난다. 이럴 땐 미련 없이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데 웬일인지 발걸음도 안 떨어진다. 입도 못 떼고 발도 못 떼고 있는데 서점을 다시 들어갔다 나오신 스님께서 다행히 말을 걸어 주신다.

 

나는 불교가 뭔지 내게 알려 줄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을 원한다. 세상을 가득 채울 칠보보다도 더 힘이 센, 그 성능 좋은 사구게가 무엇인지 내게 알려 줄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을 원한다. 함께 숨 쉬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세상을 사는 살아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랬던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살아 있는 스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 주신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셨었는지, 무슨 말씀을 여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딱 한 말씀만 제하고, 

“차 한 잔!”

스님의 처소를 찾아가는 길을 일러 주신다. ‘처소,'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이다. 책에서나 접했지 실제로 이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다. 그런 단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다니 분명 보통 분이 아니신 건 틀림없다. 겨우겨우 찾아간 스님의 처소. 스님은 그럴 수 없이 자세하게 똑바로 일러 주셨건만 다 듣고도 제대로 못 찾아가는 건 뭘까. 다 알아도 놓치는 디테일. 그게 내 모습이다. 그 디테일이 놓쳐서 안 되는 것이었음은 꼭 지나고 나서야 안다. 그래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하나보다. 놓친 디테일을 찾아 다시 오르니 말씀하신 대로 편백나무 숲이다. 산에서 보는 편백나무 숲. 느낌이 다르다. 아까 본 편백나무 군락은 넓다 작다로 보였는데 여기서는 깊다. 높이 솟았는데 높은 만큼 깊다.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사이즈와 상관없이 ‘숲’이다. 

지인이 담아 보내준 늦가을 고즈넉한 인월암


시원한 가을 바람과 따뜻한 차 한잔에 몸을 녹이다

조금 더 오르니 대숲과 함께 작은 암자가 보인다. 자그마한 법당 한쪽에 아담한 부처님이 단정하게 자리하셨고 맞은편 벽에 그림 없는, 혹은 글 없는 족자가 걸려 있다. 어쨌든 ‘빈’ 족자이다. 금강경 제일 끄트머리에 나오는 ‘글자 없는 경’인가 보다. 쭈뼛쭈뼛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부처님께 삼배 드리는 것부터 일러주신다. 부끄럽다. 절하는 것도 흉내만 냈지 내가 하는 절이 진짜 절이 아닌 건 안다. 내 절에는 아직 스토리가 없다. 대책 없는 무모함으로 여기까지 왔으나 막상 멍석이 깔리니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침묵 속에 말이 있고 말속에 침묵 있어
베푸는 문 크게 열려 막힘이 없어
어떤 종지 아느냐고 물어본다면
마하반야 힘이라고 알려주리라.
                               

                                                                             선요(원순)


오랜 시간 지나 마루인지 상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색이 깊어진 작은 찻상, 주먹 안으로 들어올 것만큼 자그마한 찻잔, 가만 들여다 보자니 허공인지 다구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것 같다. 이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니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금강경을 찾아 올라온 인연이라 스님께서 직접 한글로 번역하신 금강경을 보여 주신다. 빙고! 바로 이거다. 그냥 대충 훑어봐도 뭔가 다르다. 일단 눈에 보이는 글꼴과 글자 크기가 마음에 든다. 시각적인 게 전부는 아니나 본질적인 것은 시작부터 다르다. 편안하다.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이다. 더 좋은 건 글 만으로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살아온 경험이 짧아 그 뜻을 속속들이 음미한다고까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시원하고 환해진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존재하는 온갖 모습은 다 허망한 것이니 

온갖 모습에서 ‘허망한 모습이 아닌 참모습’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온갖 모습은 인연 따라 모였다 흩어진다. 주어진 인연에 내 생각을 보태서 집착하지 말라. 그리고 인연이 주어졌을 때는 숨 들이마시고 내쉬는 이 자리에서 그 인연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이거다! 내가 원하던 게 이런 거였어! “이런 거!”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나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런 거"는 내 마음을 바꾸고 내 삶을 바꾸고 내 주변을 바꾼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제 둘러보니 내가 그동안 겪어온 모든 것이 “이런 거!”였구나 싶다는 것이다. 제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본래 다 제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내 마음이 그들을 흔들어 놓았을 뿐.



바람 따라 울리는 청아한 울림.. 

이렇게 시작되었다

불교와의 인연은.

생전에 그렇게 말이 없으셨던 아버님이 이어주신

살아있는 인연이다.

지금의 이 시간과 이 상황이 아니면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수도 있었을...

하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인연을 일깨워 준

살아 있는 금강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깨달음을 멀리서 구하려 하지 말라

단지 마음을 쉴 뿐이다."

  








                                                              향기로운 설산의 풀 잡냄새 없어 

                                                              늘 맛있는 제호의 맛 나는 즐기네.


                                                              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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