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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Feb 09. 2020

말없음의 말

"야~야, 물 한 잔 다고 (다오)......"


아침 으스름께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아침을 준비하느라 부엌에서 부시럭부시럭하는데 웬일로 아버님이 밖에 나갈 채비까지 끝내시고는 물을 한 잔 청하신다. 허겁지겁 드렸던 기억으로 보아 따뜻한 물도 아니었나 보다. 드시는 걸 지켜 보는 것도 겸연쩍어 돌아서서 뭔가 하는 척 하는데 '위이이잉, 탁' 하며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난다.

며칠 후, 어머니였는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 아버님이 안동을 내려가셨단다. 가방도 없이 그냥 파카 차림이셨는데 그길로 안동을 가셨단다. 간다 온다 말씀도 없이 그리 휭 하니 가셨다. 평생 자식들 옆에서만 살 것 같던 어머니도 아버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석 달 후 내려가셨다.


그랬다. 그 어른은 말씀이라곤 없으셨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 손녀들도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셨다. 일 년에 몇 번, 때 맞춰 찾아간다고 연락을 드리면, "오지 마라, 기름 든다." "뭐 하러 오노? 요즘 같은 세상에... 원시인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당일 아침에는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고 어머니를 통해 전화를 넣으신다. 막상 도착하면 손주들이라고 안아 주시는 것도 아니고 아들 며느리라고 반기시는 건 더욱 아니다. 몇 마디 인사 후엔 그저 밥 한 끼가 전부다.


그러다 어느 때, 아버님이 불현듯 많은 이야기를 쏟아 내신 적이 있었다. 전화를 드리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냥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 주셨다. 오대산에 계시다가 환속하신 이야기, 서울 집 구할 때 이야기, 안동 집 이야기, 아버님의 아버님 이야기, 산소 이야기, 등등...... 말씀이 명료하고 간결해서 어느 새 푹 빠져서 듣게 된다. 어머니에게서도 남편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진기한 이야기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앞으로 어찌 될지 알고 그러신 걸까 싶기도 하다.

그 해 추석, 여전히 아버님은 오지 말라셨고 우리는 여느 해보다 출발이 약간 늦었다. 그런데, 기다림 가득한 "어데로?"가 아니라,

"지금 올 거면 오지 마라! 오지 말라는데 와 또 오노! 그냥 돌아가라!"

버럭 하신다. 진심이신가? 아직 안동 말을 못 알아듣던 나는 당혹스러운데 남편은 그냥 묵묵히 가속 페달을 더 밟기만 한다. 그날따라 아버님이 자식들을 너무 기다리셨다고 어머니가 귀띔해 주신다. 좀더 서둘러 출발할 걸... 때늦은 후회다.


그 겨울, 아버님은 다시 집으로 오셨다. 그러나 이번엔 성치 않으셨다. 루게릭 씨 병이었다. 하루하루 스러지시는 게 눈에 보였다. 혀가 마비되고 손발이 둔해지고 식도의 움직임도 느려지고 하루하루가 달랐다. 진행속도가 너무 빨라 속도가 빠르다는 생각조차 할 틈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고 하루하루가 너무 빨랐다. 그리고 폭풍 속에 우지끈! 부러지는 나무처럼 아버님은 돌아갈 준비를 하셨다. 임종하실 때, 호스피스 원장님의 청아한 천수경과 반야심경에 이어 모두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동안 아버님은 움직여지지 않는 그 손을 파르르 떨며 합장하셨다. 그 장엄함이 심장을 거칠게 쿵! 친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날로부터 5년이 지났다. 아버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도 그 '말없음'으로 참으로 많은 말씀을 하셨고 가신 후에도 그 '말없음'으로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으셨다. 오늘따라 그 '말없음'이 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다.  




진성심심극미묘    참 성품은 깊고 깊어 미묘한 이치

불수자성수연성    자기 성품 고집 않고 인연 따르니

일중일체다중일    하나 속에 모두 있어 모두가 하나

일즉일체다즉일    하나가 곧 모두로서 모두가 하나.


의상조사 법성게 중

-원순 풀어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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