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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Jan 26. 2017

텅 빈 족자

'없다, ' 그 무한한 긍정

어떤 암자에 가면 법당의 부처님 맞은편에 족자가 하나 걸려 있다. 법당에서의 족자라면 으레 佛 자나 조사 스님들의 게송 한 구절을 상상한다. 그런데 여기는


"    "


아무것도 없다. 텅 비었다. 無자보다 더 강력한 無다. 無가 씌어져 있었으면 그 無에 대해 엄청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법하다. 뭐가 없다는 걸까? "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하겠지만... '없다'는 건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없다'가 지우고 싶은 '있다'는 무엇일까? 등등. 그런데 여기는...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


눈이 안 떨어진다. 따옴표 안을 서성인다. 저 따옴표 안에 들어가고 싶다. 뿌리를 흔드는 이 꿈틀거림은 뭘까? 無라는 글자는 보기도 많이 봤고 듣기도 많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도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이 꿈틀거림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을 뿐인데...


그냥 아무것도 없을 뿐인데...


나의 사고는 온통 '일반적인'으로 포장되어 수집된 견해, 혹은 선입견 덩어리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남'의 견해와 나의 부족한 경험에서 나온 잘못된 견해로 가득하다. 내가 아는 無는 '없다'기보다 '없애다, ' '지우다, ' 혹은 '그렇지 않다'였다. 그래서 내가 아는 無는 '부정'이었다. '없다'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아는 有는 긍정이었다. 나의 의심에서 출발하지 않고 내 힘을 들이지 않은 남의 견해였기 때문에. 남의 견해를 내 것인양 생각하는 '편리함'으로 인해... '있다'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러나 이것은... 


그냥 '없음'이다. 말 그대로의 없음이다.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원래 없다는 것이다.

지우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원래 없다는 것이다.


지우고 없앤 '없다'에는 지우고 없애는 '나'가 여전히 남아 있다. 지우고 없애려고 힘을 들였기 때문에 뭔가 보상을 원한다. 그래서 無는 부정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제

그 '나'가 사라진 '없음'을 본다.

내가 없으니 욕심도, 집착도, 좋고 나쁨도 없다.

그래서 지울 것도 없앨 것도 없다.

힘을 들인 것 없이

이렇게 그냥 아무것도 없는 '없음'의 상태는...


긍정이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에...

무한한 긍정이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아유일권경 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 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 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 常放大光明


나에게는 단 한 권의 경이 있는데

종이나 글씨로 된 게 아니니

펼쳐보면 한 글자도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늘 대광명을 비추고 있네.


- 서산대사, 채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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