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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Feb 03. 2017

왜 여태 몰랐을까...

허공을 전혀 채운 바 없으나 허공에 가득하다

눈이 온다.               

살포시 살포시...


나뭇가지에도

계절을 몰라 얼결에 고개 내민

작은 꽃망울에도

가느다란 솔잎에도

살포시 살포시...  


허공을 전혀 채운 바 없으나

허공에 가득하더니

흐르는 시간을 멈춰 세우고

거기에도 내려앉는다.

살포시 살포시...



점점 하얘지는 창 밖을 바라보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문을 나선다.

발을 감싼 양말이 거추장스럽다. 후룩 벗어던진다.

발끝에서 전해지는 얼음 같은 일침이 후련하다.


왜 여태 몰랐을까?

겨우 문에서 한 발짝 나왔을 뿐인데...

겨우 양말 하나 벗었을 뿐인데...

......


눈을 감는다. 고요하다.

들리는 거라곤 내 숨소리와 눈 내리는 소리...


가만히 눈을 뜬다.

아까 만들어진 발자국, 맨발의 흔적을 눈이 보듬는다.

아까보다 세상은 더 하얘진다.


왜 여태 몰랐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걸

이렇게 경이로운 걸


눈 속에 깊이 박힌 내 발의 흔적을

눈이 채워준다.

눈으로 인해 깊어진 흔적이지만

눈으로 인해 다시 채워진다.


그리고 그 눈은...

사라진다.

사라지고 다시 생겨난다.

인연 따라 옷을 바꿔 입을 뿐...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舎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이와 같은 모든 법의 텅 빈 모습

이 ‘공’ 자체 생기거나 없어질 것 아니므로

더럽구나 깨끗하다 집착할 것 아니면서

는다거나 준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더라.


- 반야심경, 원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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