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미정 Feb 11. 2017

호래이 기름

믿음의 힘

나는 시어머니가 좋다. 그녀의 단순함이 좋고 그녀의 막무가내 고집통이 좋다. 어머니에게는 아무도 못 말리는 남다른 비밀의 힘이 있다. 어머니에게는 명절이 특별하다. 올케와 여동생을 만나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일 년에 몇 안 되는 기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팍팍한 며느리, 까칠한 아들, 말 붙이기 어려운 손주한테 둘러싸인 도시생활이 무에 그리 정 붙일 데가 있겠는가. 

명절 전에 꼭 한번씩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지? 웃기지? 할마이들 모여서 화투 치면 점 십원에 잃어 봐야 몇 백원인데 막 열내고 삐치고 한대이."

그러나 막상 화투장이 돌기 시작하면 누구보다 속상해하고 누구보다 열 내시는 게 우리 어무이다. 그렇게 속 상해하고 열 내시다가도 다음에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새롭게 속 상해하고 열 내신다. 그걸 이중성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녀의 그런 단순함이 참 좋다. 

이번 설도 예외가 아니다. 집에서 몇 걸음 안 되는 친정 오라버니 댁에서 밤새 화투를 치신다. 올해는 재수대통하려는지 생전 처음으로 따셨단다. 기대치 않은 선전에 멋지게 개평을 몽땅 나눠주고 가뜩 들뜬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웬걸, "미끄덩" 이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추운 날씨에 얼어붙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넘어지면서 뒤통수가 땅에 세게 부딪히기까지!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고, 제가 진작 붙들어드렸어야는데 죄송해요..."하면서 일으켜 주셨단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완전 감동이다. 

집에 오신 어머니가 그 얘길 해 주시는데 아뜩하다. 이걸 어째... 어지럽거나 구토증상은 없는지 확인하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넘어져 부딪친 데가 볼록 솟았다. 당장 병원 가자는데 막무가내이시다.  그럼 일단 좀 기다려보기로 하고 부족한 잠부터 채우기로 한다. 



잘 준비 하느라 화장실을 왔다갔다 하시는데... 익숙한 냄새가 난다. 어머니가 즐겨 바르시는 '호래이 기름' 냄새다. 성분이 뭔지 제대로 된 약인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그 무엇이다. 병딱지에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긴 하지만 그게 상표인지 실제로 호랑이와 관련된 성분이 있는지 알 길 없다. 어쨌든 '호래이 기름'이다. 어머니는 그걸 바를 수 있는 데면 어디든 다 바르신다. 찰과상, 말할 것도 없고 피부에 뭐가 나기만 해도 '호래이 기름'이다. 누가 동상이 걸렸다 하니 거기도 "이거 발라보라케라" 하시는 통에 모두 빵 터지기도 했다. 

"어머니, 넘어지면서 어디 다른 데도 다치셨나보네. 무릎? 엉덩이? 어디 봐요."

그랬더니 너무나 소심하고 다소곳하게 나직한 목소리로,


"아이~ [아니] 아까 그... 머리 혹 난 데 발랐다."


엥? 갑자기 무장해제다.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다. 아무리 특효약이라 믿으신다지만 지금 뇌출혈이 있을까 노심초사하는 판국에 바르는 약을 거기에다! 암튼 이 와중에 큰 웃음 주시니 긴장이 확 풀린다. 

밀린 잠이어도 낮이라 많이는 못 주무신다. 방을 나오는데 의외로 발걸음이 가벼우시다. 

"머리 어떠세요?"

"다 나았어. 이제 괜찮아. 싹 가라앉았어. 여기 만져보래 [만져보렴]."

하면서 내 손을 당신 머리에 갖다 대신다. 

헐! 이럴 수가! 멀쩡하다. 아까 불룩하던 게 흔적도 없다. 어떻게 된 거지? 


"거 보래. 그 호래이 기름 만병통치약이래이께네.
[그것 봐. 그 호랑이 기름이 만병통치약이라니까]"

믿음의 힘이다. 검증되지 않은 약을 바르고서도 이렇게 나을 수 있는 건 '이거 바르면 낫는다'는 강한 믿음이 있어서일 것이다. 약을 바르지 않아도 나을 만한 것이었거나. 물론 미끄덩의 후유증은 앞으로 계속 지켜 봐야 하긴 하겠지만 어머니한테 그런 믿음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래이 기름은 '만병통치약' 인정이다. 


믿음은 증거가 없음에도 

어쩌면 증거가 없어서 갖는 신념이다.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이다.

선지식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 화두에 대한 진정한 의심이 일어나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있어야 화두를 챙기는 마음이 일어난다. 

진실한 믿음이란 공부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선요 




매거진의 이전글 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