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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Dec 19. 2017

가장 박재연적이어서
가장 바로크적인

박재연 피아노독주회, Reflections on Baroque II

정말 오랜만에 연주회장을 찾았다. 다른 일정들에 정신이 팔려 정작 갔어야 하는 연주들을 놓친 게 부지기수다. 이번엔 기필코! 하며 몇 주 전부터 뇌새김한다. 살갑지 않은 성격 탓에, 아니 그보다, 좋아할수록 좋아한다는 표현이 무디어지는 기묘한 '나이듦'의 탓이리라, 그녀의 담백함이 좋고 그녀의 솔직함이 항상 편안하다. 그리고 이런 담백함과 솔직함은 바로크라는 시대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다. 


박재연, 믿고 듣는 연주자이기도 하지만 Reflections on the Baroque II 라는 제목부터 공부쟁이, 음악쟁이라는 느낌을 팍팍 던져준다. 프로그램 역시 구석구석 애정과 따뜻함이 스며있다. 과하지 않은 담백함, 우아함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재치, 화려하면서도 가뿐한 세련미, 진지하면서 승화된 듯한 느낌,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첫 묶음, 쿠프랭의 신비한 방벽, 라모의 상냥한 호소, 헨델의 즐거운 대장장이는 말 그대로 방벽 너머에 이런 세계가 있어요 하는 듯하다. 세 명의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이렇게 하나처럼 엮어낼 수 있는 건 무엇보다 한 시대를 꿰뚫어 내면서 하나하나 작품의 자리를 온전히 찾아줄 수 있는 연주자의 역량이다. 비슷한 바탕결 위에서 펼쳐내는 형형색색의 그림이 이채롭다. 과하지 않은 담백함, 슬픈 듯 우아한 품위, 그런가 하면 장난꾸러기처럼 건반에서 뛰노는 풋풋함,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빛으로 이어진다.


바흐-부조니 샤콘은 부조니의 이름 때문에 19세기 낭만주의 음악과 헛갈려 할 정도로 질풍노도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 곡은 바이올린 원곡을 그대로 피아노에 옮겨 실은, 바흐의, 너무나 original한 바흐의 작품이다. 굳이 어려운 말로 아는 척을 하자면 고전주의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질풍노도라는 전고전 양식의 영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연주자는 아주 오래된 서랍에 오랫동안 소중히 보관해 온 이야기를 들려주듯 한다. 때론 단단하게, 때론 격하게, 그런가 하면 Fairy Tale, 신비로운 동화를 들려주는 듯하다가 다시 태풍같이 내몰기도 한다. 장구한 이야기가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음 한 음이 오래오래 정성껏 빚어져 있다.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직조되어 있다. 


그녀의 바흐는 프랑스 조곡 6번에서도 역시 빛난다. 샤콘이 어떤 흐느낌, 긴장 속의 신비로움, 격렬한 태풍 속의 아름다움이었다면 프랑스 조곡은 외유를 접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라 한다. 한 음 한 음이 모두 바흐다. 소리가 하나하나 살아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바흐의 음악 역시 단 한 음도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다. 그녀의 바흐는 마치 공기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공기처럼 가벼우면서 빈 틈이 없다. 이 공간을 가득 메우면서도 자유롭다. 각 춤곡을 반복하면서 자아내는 다양함은 꽃처럼 향기를 뿜어낸다. 이성에도 감성에도 치우치지 않아 이성도 감성도 모두 살아 있는 연주다.


바로크 음악에 대한 현대의 반향도 흥미롭다. Pretty Damn Quick Bach라는 가상의 작곡가는 풉 하고 웃음짓게 한다. J. S. Bach에 대한 유쾌한 제스츄어다. 소리내어 웃고 싶을 정도로 재미나다. 나도 언젠가 한번 쳐 보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라 단조 프렐류드와 푸가는 이러한 바로크적 어법이 지금도 유효함을 방증해 주는 작품이다. 


바로크 시대의 반영이라는 제목처럼 이 연주는 바로크 시대의 정서를 정말 다양한 각도에서 탄탄하게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구석구석 스며있는 애정과 바로크 시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인다. 하나하나의 곡마다 담겨 있는 소우주를 가장 박재연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신비로움, 우수, 우아함, 생기, 격렬함, 서정성, 태풍, 이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것은 박재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과 담백함, 그리고 무슨 일을 해도 항상 음악을 향해 있는 그녀의 우직함은 아마도 태생적이리라. 그런 그녀이기에 이렇게 가장 박재연적이어서 가장 바로크적인 연주가 가능한 게 아닐까.


http://dalpeng.com/join01

이 글은 2017년 12월 15일 오후 6:00, 서울 모차르트홀에서 개최된 조선대학교 박재연 교수의 독주회를 보고 쓴 것입니다. 포스터와 프로그램은 위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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