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맞게 익어가는 중 : 장과함께
청년, 발효, 창업을 주제로 하는 '내일을 여는 발효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을 때, 발효라는 새로운 관심을 계속 이어가라는 손짓처럼 느껴졌다. 4주간 토요일과 일요일을 하루종일 내야하는 일정에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또래들과 창업을 엿보고 지역을 걷는 자리는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정성스레 참가 신청서를 작성하고 입금을 잠시 미뤄두고 있던 나는 며칠 뒤에 참가 취소를 알렸다. 당시에 나는 한 시민단체에서 재계약을 하기 전 한 달간 휴가를 내고 진주에서 요가를 안내하고 있었다. 요가를 꾸준히 하면서 요가 안내자의 길을 내고 있던 나에게는 언제나 '하나를 집중해서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감시자가 있었는데 감시자는 프로그램을 참가하지 말라고 했다. 서울 돌아가면 당장 할 일이 많다고, 요가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요가만 관심을 두라고.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아 이후에도 새로운 기수가 계속 생겨났지만 그때마다 감시자의 말을 따라서 마음을 덮었다.
그런데 새로운 기수가 만들어지고 대기 인원을 받을 때에 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에게서 항상 연락이 왔다. 혹시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대기를 걸어놓겠다고. 두어차례 거절하다가 문득 '자꾸 연락이 오는 걸 보니 하고 싶은 거 덮어두지 말고 해보라는 신호인가보다' 싶어 신청을 했다. 무더위가 한창일 7월과 8월 나는 발효와 함께 여름을 보내기로 했다.
된장, 청국장, 식초, 전통주 등 전통적으로 인식되는 발효 음식부터 와인, 오이지, 김치국물로 만든 스낵 등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지는 발효음식, 그리고 발효를 주제로 한 공간들까지. 발효라는 하나의 주제로 다양한 모습의 창업을 한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맛보는 시간을 보냈다. 장수, 용인, 충주, 보은 등 생산지를 방문하면서 발효 음식을 생산하는 이들의 말간 얼굴과 그 지역의 미생물을 몸으로 만나는 여행을 했다. 나는 새로운 경험과 흥미로운 이야기가 좋아서 꿀떡꿀떡 그 시간을 마셨다. 무더운 여름에 목을 축이듯이 그들의 이야기는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휴롬으로 일년에 5톤의 배를 갈다가 공장형 착즙기로 100톤의 배를 갈게 된 이야기는 젊은 창업자의 전형적인 성공 신화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자기 식당에서 남는 시간에 남는 김치 국물로 스낵을 만들던 것을 공장형 설비로 옮기면서는 스낵을 만들기 위한 무김치를 위탁생산하기까지의 시행착오를 들었을 때는 내 가슴이 다 답답했다. 오래도록 먹어온 엄마의 오이지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감각으로 브랜딩을 해 낸 재주가 부러워서 자꾸 나를 비교하기도 했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묵묵히 장과 식초를 생산하고 있는 이들과 만날 때면 마냥 부러웠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도시에서의 옷 한겹은 나는 무척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고 있냐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며 자연스레 파트너의 일을 동업하게 되면서, 누군가는 장인어른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누군가는 동업하는 친구와 때마다 손내미는 지원사업이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면서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인연이 있었다는 것. 그 이야기의 공통 재료를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인연에서 귀인으로, 나만에 바람에서 우주의 흐름으로.
4주간의 발효학교 과정을 마치고 과제가 있었다. 예시로 들어준 여러 과제들 중 '나의 발효 10년 계획'이 눈에 들어와서 골랐다. 그리고 10년을 5년으로 바꾸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10년의 계획은 터무니 없이 느껴졌고 그런 세상에 즉흥적인 기질까지 타고 났기 때문에다. 선 하나를 세로로 길게 긋고 가운데 점 하나를 찍었다. 이 점은 현재다. 점의 위쪽으로 올라가서 내가 만든 길을 돌아보았다.
전세계를 누비는 항해사를 꿈꾸면서 공부를 했다. 실제 배를 타고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경험하고 그만두었다. 실은 높은 급여와 여행에 대한 로망에 부풀어올랐지 나의 성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이었다. 항해사로 가는 길이 막혔다. 육지에 자리를 잡아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으나 경직된 조직 안에서 일을 하는 시간은 인생 전체를 퍽퍽한 질감으로 만드는 일 같았다. 나의 척추도 경직이 되어가는 와중에 요가를 만났다. 비뚤어진 몸을 가졌으니 평생 요가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요가 지도자로서의 길을 하나 만들었다. 좋은 대학엘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가는 길을 그다지 즐기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원점으로 돌아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면서 비슷한 듯 다른 길을 계속 만들어왔다. 그 중 하나가 지속가능한 채식 생활을 위해서 꾸준히 요리를 해오며 건강이 관심을 두었던 것. 그러다가 이렇게 발효학교까지 흘러와 '현재'라는 점을 만났다.
점 아래로 내려와 '현재 이후'의 그림을 그려보았다. 1년 전부터 시작한 사찰음식전문조리사 과정을 마무리하고 기회가 된다면 자격증을 따야지. 친구들과 된장을 담근 즐거운 경험을 독립출판물로 만들어야지. 잠깐 독립영화를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서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시작해야지. 지금 만나는 이와 평생 반려인이 될 약속을 하고 출근길 아침밥과 퇴근길 저녁밥을 차려줘야지. 함께 살 집에는 베란다가 있으니 흙과 항아리를 두고 베란다 장독대를 만들어야지. 집 안의 그늘지고 통풍이 잘 되는 곳은 '광'이라 이름 붙여서 발효식품을 놓아두어야지. 기회가 된다면 동네에서 작은 공간을 하나 구해서 외국인 친구들에게는 낯설고 동네 사람들은 익숙할 한국의 음식을 만드는 쿠킹클래서와 소셜다이닝을 해야지. 이런 자잘한 일들은 10개는 더 적을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을 5개년 계획 안에 두고 '수련기간'이라고 퉁 쳤다. 기본기를 닦고 나만의 개성을 쌓는 기간.
5년 이후의 삶은? 잘 모르겠다. 사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소포장 발효 레디소스 사업을 할 생각이다. 요가 안내자의 길과 발효 음식의 길 사이를 터서 웰니스 공간을 만들어도 좋겠다. 영상 콘텐츠가 잘 맞고 잘 된다 싶으면 콘텐츠 제작을 전문으로 할 수도 있겠다. 이제 진짜 자연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때가 오면 자연을 곁에 두며 장을 생산해야지. 그때는 장을 만드는 만큼 글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도 10개는 더 할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얼렁뚱땅 5개년 계획 완성. 이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무척 많구나. 그 일은 어쩌면 모두 하나의 길 안에 있구나. 내가 어려워하는 건 무언가를 하나 하겠다고 결정하는 일이구나. 발효학교에서 만난 분들을 통해서 결정은 오롯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배웠다. 오고가는 인연에 따라서, 흐름 안에서.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어떤 선택의 시기에 나의 바람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맑은 상태에 두는 것이겠다.
장을 담글 때 여름은 숙성, 겨울은 안정의 시기이다. 이번 여름, 나는 나의 길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한차례 걸쳤다. 여름에 장이 한 차례 끓어오르는 것 처럼. 겨울이 오면 나도 안정이 될 수 있을까. 깊은 맛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장도 나도 알맞게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