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행복을 깨달았다. 뒤늦게 읽은 행복에 관한 많은 책(그중에서도 백미는 세네카의 행복론이다.)은 마치 내 생각을 읊어놓은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행복을 깨달았을까. 뒤돌아보니 나는 행복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 누구보다 힘차게 발길질해왔다. 불행한 경험을 어릴 때 많이 해서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서는 세속적인 성공보다 오히려 행복해지는 게 살기 위해 더 다급한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불행의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오다 보니 자연스레 행복에 대해 공부가 되었다. 대다수 행복에 대한 나의 가치관은 책이나 현인들의 가르침보다는 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중대장 하던 시절에 입대하는 장병 중 상당수가 불행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나는 대담하게도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너희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미 정상에 오른 사람은 내려갈 길 밖에 남지 않았지만 바닥에 있는 사람은 이제 올라가는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사소한 사랑에도 몸서리치도록 기쁠 것이고, 작은 성취에도 긴 여운의 행복을 만끽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누구보다 깊고 진한 와인의 풍미 같은 행복을 누릴 준비를 일찌감치 끝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통의 사람들은 행복을 누릴 용기가 없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데 행복해도 되는가.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돈이 없는데 행복을 누린다고? 집이 없는데 행복하다고? 매월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데 행복하다고? 이와 같은 자기 의문이 생기는 이유는 애초에 행복에 대한 정의를 잘 못 내리는 데 있다. 행복에 대한 관점을 다시 맞출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일부 젊은이들이 논하는 허무주의적 행복이 옳다는 것도 아니다. 일부 행복에 대해 논하면 허무주의에 빠져 YOLO(You only live once)나 소확행과 같이 큰 성공을 이루기 어려운 세대들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정신승리라는 소리를 받기 십상이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행복이 아닌 불행을 위해 살았던 세대는 전무하다. 모든 인류는 행복을 추구했고 그것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행복의 의미가 변한다거나,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변할 수는 있어도 행복 자체를 쫓는 인류의 삶의 태도가 변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식상한 일이다. 이미 2천여 년 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행복론이라는 책을 저술했고, 그 이전에 있던 수많은 현인, 철학자, 지도자들은 저 나름의 방법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잘 살아내는 법에 대해서 논한 바 있다. 이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쓰면서 느낀 바는 21세기 지구 시민으로 살아가는 이 순간 역시 거대한 인류의 시계 속에서 반복되는 진부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질문이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라는 것에 있다. 수만 년에 걸쳐 내려온 이 질문에 왜 아직도 우리는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클루지 같은 인간의 사회적 진화에 있다고 본다.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 진화를 겪었다. 하지만 행복은 결국 자기 몫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괴리가 발생한다. 나의 행복과 사회에 속한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상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