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어려운 주제를 이제 꺼내들 때가 되었다. 돈 문제다. 정치인들 중에서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그중에 근현대사에서 단연코 가장 유명한 말 하나를 꼽으라면 '골리앗' 조지 H. W. 부시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다윗' 빌 클린턴의 말이었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경제는 A to Z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행복도 예외는 아니다. 돈이 넘치는 상태에서의 행복은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돈 없는데 행복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도 되지 않고 그런 상황을 정신승리라고들 비꼰다. 사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지금 엄청난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으며, 당장 수개월 이내에 전세보증금을 마련해야 하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 경제적인 어려움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전세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하게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팔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분명히 작은 집으로 가면 불편하고 돈이 없어 집을 나가야 하는 굴욕감과 상처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쯤은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회복탄력성을 갖추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두 가지 키워드 중 하나인 회복탄력성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세네카는 '행복론'을 통해서 행복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중에서 경제와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여럿 등장하는데 결과부터 말하면 행복 없는 경제는 무의미하다는 데 있다. 오히려 행복이 없는 경제는 목적이어야 하는 행복대신 수단을 더 많이 가진 상태로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는 목적을 수단으로 채우려는 상황이 되어 무의미한 허세, 허영만 반복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논리에 완벽하게 지배당하고 있는 덕분에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제의 중요성, 경제적 자유 등을 강조한다. 사실 이 책 자체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의 제목에서 따온 만큼 그 논리에 대응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이 시대는 모든 것이 부자가 되기 위한 여러 논리를 제공하는 '부자 자기 개발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군인에게 사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책들은 그렇다면 나라를 지키는 사명 같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애초에 부자 될 수 없으니 포기하라는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다 그만두고 사업자로만 채워진 세상이 되길 바라는 것인가?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마치 돈 없는 패배자처럼 만드는 이런 책들에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돈돈돈 돈 얘기만 하는 이 책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감히 이런 말을 꺼내 들면 공격당하기 참 쉽지만 n포 세대라고 하는 지금 세대를 만든 것은 사실 정부의 정책도 아니고, 경제적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경제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린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세대의 DNA가 다른 사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건 결코 지금의 세대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사실 어른 세대들은 지정학, 지경학 등의 세계 질서 때문에 습관적으로 전쟁을 했다. 그때는 아마 "바보야, 문제는 지정학이야." 였으리라. 그러니 그 시대를 어떤 캐치프레이즈가 지배하고 있느냐가 핵심인데 지금은 경제다. 인류 역사에서 경제가 중요하지 않았던 적은 없으나 적어도 지금 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조선시대 초가집에서 사는 흥부도 아이를 일곱 명이나 나은 것을 보면 아이를 낳고 못 키우는 것은 적어도 경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가 문제인 것으로 된 시대다.
여기서 우리는 행복한 아빠, 행복한 사람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은 회복탄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행복이라고 하는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그 외의 수단의 부족에서 오는 고통은 높은 자존감과 회복탄력성으로 충분히 극복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경제적 실패와 같은 것은 더 큰 행복과 성공으로 가기 위한 학습과 성장의 과정이지 그 자체가 좌절이 아닌 것이다. 많은 경제 관련 서적의 내용은 사실 틀린 바는 없다. 하지만 그 서적들이 밝히고 있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책 속의 성공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회복탄력성이 알고 보면 성공의 요체라는 것이다. 수많은 실패를 겪은 사람도 다음 페이지를 넘어가면 단 몇 줄의 극복과정으로 다시금 재기하고 성공해 낸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 후 화려한 반전의 성공에만 집중하다 보니 그 연결과정에서 오는 그들이 가진 진정한 재능은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저 화려한 성공에 집중하며,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의 현 상태를 원망하거나, 지나친 낙관주의자만 만들어낼 뿐이다. 그런 면에서 경제 관련 서적은 한국사회와 맞지 않다. 대다수 이런 서적들은 서양의 것(혹은 탈아입구를 외치며 서양을 지향한 일본의 것)들이다. 서양과 한국의 발전 과정은 너무나도 다르다. 우리가 정말 인정해야 할 것은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정치 체제는 왕정이었다. 왕정이 갑자기 황제정이 되고 민주정이 된 것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의 시민이 탄생하기까지의 그 과정을 우리는 겪지 않아 그들과 너무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서양인들이 쓴 경제 자기 개발서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DNA에서 나온 성공의 방식이 담겨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나로 존재하고, 나로 살고, 나의 삶을 살고, 행복한 나를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상태에서 이후 돈을 버는 방법이 마치 천년의 비기인 것처럼 나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DNA에는 나로 존재하고, 나로 살고, 나의 삶을 살고, 행복한 나를 살아야 한다는 DNA가 없다. 공동체주의가 아직도 DNA에 남겨있어서 사회에 기여하고, 가정을 이루어야 하고,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자신을 낮춰서라도) 타인을 배려해야 하고,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시작점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공식을 넣었을 때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투입되는 상수가 다르면 방정식이 아무리 같아도 그 결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책들을 잘못 읽고 있었다. 전혀 다른 삶의 태도와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회복탄력성이라고 하는 비밀의 키를 전혀 갖추지 않은 채 그저 돈돈돈만 외쳤던 것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에리히 프롬의 책 '소유냐, 존재냐'다. 앞서 말한 회복탄력성과 같은 고도의 정신적 무장을 갖추기 위해서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To have or To be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명언인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원문은 "To be or not to be."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와 햄릿의 유명한 명대사가 동시에 관통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To be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담긴 신 '여호와'는 '나는 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영어로는 'I am the who I am.'인데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신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신이며, 우리는 그의 형상(여기서는 외적인 형상이라고 볼게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형상으로 인식해야 한다.)을 본떠 만든 우리라면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최초의 악행을 저지른 하와가 내미는 사과를 자신의 줏대 없이 날름 받아먹고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니 하와가 줬다는 핑계를 대며 인류의 원죄가 시작되는 장면을 보면 우리의 첫 죄악은 나로 존재하지 못함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다. 선악과라는 것 자체가 먹으면 신이 되는 과일이었는데 나로 존재하면 될 것을 굳이 신(타인)이 되고자 했던 하와나 그녀의 꼬드김에 넘어가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타인이 결정하게 둔 아담이나 모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했던데 원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그들의 뿌리로 갖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서양인들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심리학의 발달 과정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많은 문화, 예술이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이 시작이었다. 그래서일까 서양의 유명한 화가들은 자화상을 꼭 남겼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묻는 질문 그 자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공동체에 대한 질문이 더 많았다. 나보다는 공동체. 사회의 발전. 이것이 아시아인의 DNA일까?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인들은 유독 이러한 생각을 더 많이 한다. 결국 여기에서 우리는 경제적 관념의 차이가 심대하게 발생한다. 서양인들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경제가 수단으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열심히 돈을 벌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이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면(이런 사람들이 세상이 더 많다.) 돈을 위해 그렇게 까지 삶을 허비하지 않는다.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하는 명언이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오는 키팅 선생의 말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 미, 낭만, 사랑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다."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왜 사는가? 그렇게 경제적인 부유함을 만들고 나서 비로소 우리가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소비하기 위해 경제적 부를 생산하고자 한다.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은 돈을 마음껏 쓰기 위함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그렇게 돈을 벌어 소비를 하면 사실 결국 국가 경제만 성장한다.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어 국가 경제를 배불리 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국가 경제가 튼튼해지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 경제가 튼튼해진다면 상대적으로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복지비용을 지출할 수 있기 때문에 부의 재분배가 선순환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잘 살기 위해서만 돈을 버는 사람이 이러한 선순환 구조에 가담하기 위해 돈을 벌까? 그렇지 않다. 결국 이는 사회적 갈등으로 부상한다. 공동체만을 위해 강요받은 가운데 자기 잘 살겠다고 힘들게 돈 번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나눌 리 만무하다. 공동체를 위한 분배는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의 부의 분배 역시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분배는 그것을 가치로 삼은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찌 보면 놀기 위해 산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놀이가 앞서 4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보이는 소수의 셀럽이 가진 멋들어진 놀이만이 놀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그 찰나의 놀이를 위해 너무 많은 노동 시간을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살고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