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유난히 한국 사회는 더 그렇다. 공동체 의식이 강해도 너무 강한 나머지 유행을 좇고 체면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한국인의 DNA에 아로새겨진 이 의식은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발현되었다. 자신만의 놀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 인기 있는 것을 쫓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피해는 개인에게 고스란히 체면 비용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의식하지 못한다. 아니 의식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과감하게 인생 전반을 이 체면 비용으로 지불하는데 거리낌 없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유명한 식당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너도나도 유행을 좇는 그 식당에 꼭 가야 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그 식당에 다녀온 사람들의 소식을 보며 질투심에 견딜 수 없고 나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을 받는다. 오랜 시간을 줄 서 그 식당에 겨우 간다. 비싼 비용을 들여서 식사를 한다.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맛있었다고 남겨야 한다. 이러한 식당, 유명한 장소에 계속 가야 하기 때문에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반복되는 번뇌다. 또한 이 과정에서 유명한 식당만 돈을 벌고 그렇지 못한 식당은 결국 망하게 된다. 다양성이 떨어진다. 우리는 결국 미디어의 권력이 가리킨 방향으로 모두가 살아가기 바쁘다. 좀비처럼 모두가 그곳으로 나아간다. 그게 죽음에 이르는 길이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이 길에서 이탈하여 혼자 다른 길을 가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끔찍한 죽음이다. 용기가 없고 담대함이 없다. 공동체에 숨어야만 안심하는 공포 사회다. 한민족 자체가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제 강점기 때 너무나도 고통을 받았던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를 지나며 의식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의식이 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 사회 속에 평생을 경쟁하며 살도록 강요받는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라면 오로지 자신의 길만 묵묵히 나아가면 되겠지만 우리는 특정 권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모두 몰려가니 수많은 경쟁자를 양산해 낸 것이다. 특히나 아빠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해야만 한다.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해야 하고, 다른 아빠보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경쟁해야 하고, 다른 남편보다 멋지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경쟁의 연속이다. 누굴 위한 경쟁인가? 이런 경쟁 사회에 가스라이팅 당한 아빠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인데 알고 보면 그런 경쟁의 끝에는 결국 자본가만 배부르고 사회만 성장할 뿐 각 개인은 끝내 채워지지 않는 탐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뿐이다. 내 친구 중에서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이런 경쟁 사회를 탈출하여 은퇴를 해버린 사람이 있다. 시간 부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과감하게 대기업을 퇴사한 이 친구는 제주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고민이라는 이 친구의 고민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고민하는 자체가 인간이 진정 누려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입시 과정을 함께 겪은 친구로서 나보다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사회에서의 성공을 누렸던 친구기에 지금의 고민은 그 당시 잰걸음으로 걷느라 돌아보지 못한 세상을 조금 더 섬세하게 볼 기회를 만든 것뿐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선택을 한 그 친구를 응원한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젊은 나이인 서른 중후반에 경쟁에서 스스로 물러선 것을 보며 세간에서는 주저리주저리 비평할지 모른다. 남자가 꿈이 그것밖에 안 되냐, 그 능력이면 더 벌어서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지 않느냐,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로 보일 것이냐 등등. 하지만 나는 반문하고 싶다. 내 친구에게 그런 비평을 할 시간 있으면 당신들이야 말로 당신의 삶에 집중하라고. 그렇다고 이 친구가 경쟁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친구의 경쟁은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경쟁해야 할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이다. 인생을 살면서 경쟁해야 할 존재인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끊임없이 나와의 경쟁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나으면 된 것이다. 가끔 우리는 슬럼프에 빠져서 지금의 나를 이겨내지 못하거나 기준 자체를 잡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 선의의 경쟁을 할 진정한 라이벌인 친구 한 명 정도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 친구는 아주 구체적인 어떤 누군가여야만 의미가 있다. 하니에게 나애리가 있고, 슛돌이에게 줄리앙이 있었던 것처럼 구체적인 어떤 누군가야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리바이어던과 경쟁하고 있다. 높은 직급을 위해 경쟁한다. 경쟁의 대상이라는 게 누구인가? 더 멋진 삶을 위해 경쟁한다. 멋진 삶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부자가 되기 위해 경쟁한다. 도대체 부자의 기준은 누가 정했는가? 우리는 구체적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무의미한 허상과의 경쟁을 하느라 일생을 다 바칠 뿐이다. 우리는 더욱더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는 분명하다. 내가 욕망하는 바와 경쟁하면 된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차근차근 배워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와의 경쟁이다.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을 댄 활을 긋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나비야'를 연주할 수 있었고, 두어 달 뒤에는 '공원에서'를 연주했으며, 이후엔 '할아버지의 11개월'을 연주했다. 어렴풋이 비브라토도 따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나와의 경쟁 상대는 오직 나였을 뿐이다. 내가 만약 남들에게 멋져 보이고 싶어서 경쟁하듯 바이올린을 배웠다면(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바이올린 켜는 나의 모습을 자랑하려고 등등) 경쟁하는 그 이유조차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며, 금방 지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바이올린 선율을 나 스스로 연주하며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의 아름다운 음악을 내가 직접 연주해보고 싶다는 열망. 그러한 것들이 나로 하여금 나와 경쟁하게 만들었고 나를 성장시켰다. 이 목적은 분명하다. 앞서 말했던 시, 미, 낭만, 사랑 바로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생계에 크나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엄청난 경쟁을 뚫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진짜 위대한 이 시대의 일류들을 보자.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이 유일한 경쟁 상대였고 분명한 목적을 갖고 경쟁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신의 레이스를 묵묵히 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세상의 모든 경쟁 상대들을 물리치고 최고에 우뚝 섰지만 이것은 묵묵히 자신의 레이스를 펼쳐서 성공한 결과인 것이지 그 자체가 목표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무엇이 옳은지 다 알고 있다. 누구와 경쟁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고 무엇이 진정한 목적인지도 알고 있다. 무엇이 행복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지 못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이 두렵다는 감정 역시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답이 나왔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첫 번째 경쟁 상대는 두려워하는 나 자신일 것이다.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이 시대 아빠의 삶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