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터족은 일본에서 1980년 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사회적 현상에 따른 부류를 지칭하는 말로 프리(Free)와 아르바이트(Arbeiter)의 합성어이다. 취직보다는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청년층을 지칭하는 말로 일본에서 당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생겼을 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부모 세대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풍요로움을 이어받아 지켜나가기보다는 빈둥빈둥 놀면서 세월을 낭비한다는 시선 때문이었다. 비정규직이라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필요할 때마다 일을 구해서 원하는 만큼만 돈을 벌고 쉬면서 놀고 삶을 즐긴다는 면에서 그들 스스로는 단순한 비정규직 혹은 빈둥대는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은 것인지 프리라는 용어를 쓴다. 자유로움이 그들의 특성이다. 선택적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스로 그런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도 2010년 이후부터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걔 중에는 상당히 프리터족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 욜로족(YOLO, You only live once)이 득세한 것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사회적인 시선에서는 그들이 도전 의식도 없고 패배감에 스스로 정신승리하며 꿈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프리터족은 조금 다른 개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돈이 엄청 많은데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욕구를 내려놓고 그저 자신의 소소한 욕구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도 많다. 특히 이런 부류는 서양에서는 매우 흔하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서 시작된 프리터족이지만 그런 형태의 삶은 이미 서구에서 젊은 층에서 보편화된 삶의 형태였고 동양에서는 바라보는 한 개인에 대한 잣대(특히나 남자, 아빠가 될 사람, 가장이 될 사람)가 더욱이 공동체 중심의 시각이다 보니 비난할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용어가 생겨나고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라고 명명한 게 아닐까.
최근에는 프리커(Free + Worker)라는 용어도 쓰인다. 프리터가 되었든 프리커가 되었든 혹은 서구권에서 사용하는 보헤미안이나 집시 스타일이 되었건 아니면 현상을 지칭하는 욜로가 되었건 더하여 파이어족(Finacial Independece Retire Early)이 되었던 공동체를 한 개인보다 매우 중시하는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는 동양권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은 문제가 있는 사회적 부류일지 몰라도 이들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중요한 가치는 바로 돈, 물질이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데 있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 중 하나다. 프리터족 역시 돈이라는 것은 수단이기 때문에 목적인 삶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자신의 필요만큼만 돈을 벌면 나머지 시간은 행복(목적)을 위해 수단을 사용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의 가치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자 프리터족으로 가장이 되어 살 수 있느냐는 질문도 소셜 미디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한 젊은 사람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아파트 경비원이 되어 200만 원도 안 되는 박봉을 받으며 살지만 하루 8시간 근무 시간을 준수하고, 1년 연가 20여 일을 모두 사용할 수 있으며, 특가 판매로 나오는 해외여행 티켓을 구해서 해외여행도 1년에 한 번 이상 꼬박꼬박 다닌다며 행복한 삶을 구가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아이 낳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딩크족 부모도 있는가 하면, 아이는 온 우주가 함께 키워준다는 믿음으로 낳아서 여러 사회적 제도와 편리해진 인프라를 이용하여 큰돈을 들이지 않고 잘 키우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게 맘카페 나눔 현상 같은 것인데 정말이지 옷 한 벌 안 사고도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아이에게 최고의 옷, 최고의 유모차, 최고의 분유를 먹이고 싶다는 것이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아이를 정말 행복하고 건강한 아이로 잘 키우겠다는 것이 나의 욕망인지 물어봐야 한다. 대다수는 체면 때문에 아니면 내가 편하고 싶어서 등등의 여러 이유 더불어 소셜 미디어에서 나오는 광고들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함으로 생긴 잘못된 인식의 오류는 아닌지 고민해 볼 문제다.
이렇게 깊게 고민하다 보면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대신 산다는 생각에 이를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여행인데 나는 정작 여행 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좋은 정규직을 얻고 매일 아침 넥타이 매고 출근하지만 일이 너무 바쁘고 경쟁이 너무 치열해 감히 해외여행을 갈 엄두조차 낼 수 없다면 과연 이것이 내 삶을 사는 것일까. 또한 해외여행을 간다면 나에게는 얼마큼의 돈이 필요한지 깊게 고민해 보았는지도 질문해야 한다. 구체적이지 않은 개념만 갖고 ~하고 싶다 하는 것은 사실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잘 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얼마나 흥분되고 기대감이 넘치는지. 그렇기 때문에 진정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면 아무리 P(인식형)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J(판단형)가 되어 그 구체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계획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을 잘 마주해야만 한다. 소셜 미디어에 나온 멋들어진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나서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그러면 우리는 그곳에 대한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또 웹서핑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이미 다녀온 셀럽들의 경험에 귀 기울이다 보니 셀럽이 추천하는 맛집도 가야 하고, 기념품도 사야 하며, 심지어 1등석도 타봐야 하는 등 비용만 늘어날 뿐이다. 프리터족이 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어찌 보면 나의 욕망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애초에 큰돈을 벌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은 내가 수단인 돈에 얽매이지 않고 목적인 나의 삶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보고 욕망이 생겼다면 이후에 아무리 웹서핑을 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한다. 내가 그 여행지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이 위대한 자연이라면 자연을 볼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히려 튼튼한 신발 한 켤레와 나의 두 다리면 족하다. 비싼 음식점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한참 떨어진 곳까지 이동해야 하는 소요를 만들어 되레 비용만 올린다면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일까? 가령 북해에서 오로라 아래 헤엄치는 고래를 보고 싶다면 그 고래를 보는 경험만을 위해 투자를 할 때의 비용이 기왕에 한 번 간 김에 모든 욕구를 다 마치고 오겠다며 쓰는 비용보다 훨씬 저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경험을 위해 그곳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방문하게 될 수 있다. 오히려 더 많이 갈 수 있고, 더 많이 가다 보면 나만의 경험이 생기고 그것이 또 콘텐츠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삶이다. 그게 바로 나의 선택이다. 프리터족이 가진 삶의 철학은 패배주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나의 욕망에만 귀 기울이겠다는 오디세우스*와 같은 영웅의 삶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스스로의 결정이다. 프리터족이건 프리커족이건 욜로족이건 파이어족이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 중에서는 분명 엄청난 승부욕과 권력욕이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이 평생 삶을 치열하게 도전하며 사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또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또 가장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질문하고 마주하며 답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삶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는다. 교육 현장에서 이런 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이 있는 바다를 통과할 때 그들의 노래와 아름다운 여체를 보고 유혹에 빠져 바다로 제 발로 들어가 잡혀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호기심에 자기 자신을 배의 돛에 묶고 선원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게 한다. 배를 타고 가며 세이렌의 노래도 듣고 그들의 모습도 감상하지만 돛에 묶여 있어서 바다로 갈 수 없다. 본질에 집중하고 자신의 욕망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영웅의 모습으로 유명한 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