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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Jun 27. 2023

엄마의 가드닝

브라보 마이 마더스 라이프

* 산책을 하다 무심결에 발견한 낮달맞이꽃이 너무 예뻐서 옮겨 심으셨다는데 이제 우리 집 뒷마당은 낮달맞이꽃밭이 되었다.


 요즘 우리 가족 톡방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문자는 엄마가 심은 꽃 자랑 문자다. 제주에는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 덕분에 가드닝을 하기 더욱 좋으니 비가 내리는 이 계절이 엄마도 식물도 모두 신이 난 모양이다. 누군가에게는 꿉꿉할 수도 있는 이 계절에 마당을 푸른색 가득하게 피워내는 엄마의 솜씨에 농담 삼아 방송통신대학교 식물학과라도 지원해 보라고 말한다.

은퇴 후 제2의 삶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누리는 엄마. 얼마 전 방통대 교육학과를 등록하셨는데 내가 볼 때는 식물학과를 가셨어야 했다.

내가 어릴 적 엄마는 흔한 주부의 삶을 사셨다. 흔히 말하는 밥 하기, 빨래하기, 청소하기와 같은 집안일을 도맡아 주셨다.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워낙 능숙하게 척척 잘 해내셨기 때문에 공기의 존재처럼 그 역할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했었다. 어른이 되어서 혼자 살아보니 나와 동생이 건강하게 자란 것 역시 엄마가 주마다 대청소를 하며 환기도 시키고, 늘 깨끗한 것 입히고 먹인 덕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엄마는 사회적으로 남성다움, 여성다움이 구분되던 시기에 여성적인 취미도 상당히 좋아하셨다. 꽃꽂이도 하셨고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도 많은 식물을 가져다 놓으셨다. 정말 많은 꽃을 가져다 놓으셨는데 그중에서 백미는 스킨답서스였다. 온 집에 치렁치렁 숲처럼 스킨답서스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그런 풍경이 나에겐 참으로 익숙했다. 꽃도 많이 심으셨는데 배고니아를 특히 좋아하셨다. 기르기도 구하기도 쉬워서였을 것이다. 처음엔 이 꽃 이름을 듣고 백 원 주고 꽃을 사 오셨다는 건 줄 알았다. 엄마의 식물 사랑은 아마도 고된 집안일에 조금이라도 쉼이 될 수 있는 엄마 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을 하다 보니 내 사무실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져다 놓고 그것으로 위안을 얻듯이 엄마에겐 집이 곧 사무실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평생 식물 키우는 주부로 사신 엄마는 결혼을 앞둔 나에게는 아내에게 집안일을 도맡아 시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당신께선 으레 천상 현모양처로 사셨지만 며느리에겐 그런 역할을 절대 바라면 안 된다며 이제는 남자들도 요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시대가 왔노라며 나에게 (아빠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얼마만큼일까? 작은 공간에도 오순도순 식물원을 만들어내는 엄마의 솜씨에 놀라움을 느낀다. 손짓으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피티 같다.

홀로 계신 엄마를 언젠가는 모셔야 한다는 장남으로서의 부담감이 늘 있었는데 이것을 부담이 아닌 행복한 기억으로 만들고자 하는 나만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리고 가족들을 설득하여 제주땅으로 온 가족이 이주했다. 엄마도 서울에 집을 팔고 모두가 함께 모였다. 다섯 가족에게 필요한 땅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살아보니 200평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해서 구한 집이 지금의 집이다. 모두의 꿈을 구현할 수 있는 장소로 마땅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저마다의 마당에 저마다의 꿈을 심어 나갔다. 이사한 첫날부터 엄마는 마당에 앉아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주인 없던 집이라 마당이 다소 정리가 안되어 있었는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뙤약볕에 걱정이 되어서 가드닝을 위한 도구와 햇볕을 피할 모자 등을 구매해 드렸다. 엄마도 처음엔 잡초를 제거하고 잔디를 가꾸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3년이 지나니 엄마의 가드닝은 그 수준과 영역이 차원이 다르게 성장했다. 더 이상 엄마는 잔디를 유지하기 위한 잡초 뽑기는 하지 않으신다. 대신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식물 모종을 가져오시고는 그것을 정원에 옮겨심기 시작했다. 카나리아 야자수 아래에 피어난 가자니아를 보고는 감탄하셨던 엄마가 이제는 그보다 더한 규모의 대단한 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처음 향기를 맡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던 치자꽃이 드디어 우리 정원에 생길 예정이다. 치자꽃 향기가 날 때마다 난 이제 엄마를 떠올리겠지.

텃밭에서 매일 저녁상에 오를 상추와 부추를 만들어낸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엄마의 꽃밭, 텃밭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멋진 공간이다. 작년에는 낮달맞이꽃이 예뻐서 심어봤다고 말씀하셨는데 해가 지나고 나니 그 일대가 모두 낮달맞이꽃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해서 들국화를 피어내고, 메리골드를 피어내고, 사랑초를 피어내고, 카네이션을 피어냈다. 오일장에서 모종을 가져오시기도 하고, 무심한 듯 길가에 핀 꽃을 입양하시기도 했다. 타운 내 다른 정원의 꽃을 가져오시기도 했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버려졌던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물을 주고, 꽃을 심었다. 텃밭에는 계절에 따라 상추가, 부추가, 고추가 심어졌다. 아이들에겐 앞마당의 너른 공간과 정원 한편에 놓인 트램펄린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할당되었다. 나는 꽃도 좋지만 나무를 가꾸었다. 벌에 쏘이고 톱에 베여가면서 정원 구석에 있던 잡목들을 모두 베어내고 공간을 만들었다. 중학교 때 배운 가드닝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동백나무를 옮겨 심고, 철쭉을 가꾸고, 카나리아 야자수의 잎을 잘라냈다. 아내는 엄마랑 같이 텃밭을 가꾸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콩불을 만들면 싸 먹을 상추며 부추며 푸릇한 채소를 마당에서 갓 따와 흙을 툴툴 털어내고 이슬방울 묻은 그대로 식탁 위에 올렸다. 농약 한 꼬집 들어가지 않은 말 그대로 유기농 친환경 식품이었다. 상추는 야들야들 부드러웠고, 부추는 아삭아삭 싱그러웠다. 정돈되지 않았던 이곳이 엄마가 온 이후로는 하나씩 정리가 되었다. 이웃들 역시 그런 모습이 모두가 저마다의 정원을 잘 가꾸어주시니 타운 전체가 늘 싱그러운 계절의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변했다.

텃밭 가득히 자라난 부추. 부추는 물만 주면 계속 잘라먹을 수 있다. 시장에서 파는 잘린 부추는 생명력을 잃었지만 텃밭의 부추는 성장하는 살아있는 부추다.

제주도 남원에 가면 현맹춘 할머니께서 가꾸신 동백숲이 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신 현맹춘 할머니는 제주의 매서운 바닷바람을 막고자 한란산에서 동백나무를 캐와서 직접 숲을 가꾸기 시작했고 지금 그 일대는 그 유명한 위미 동백 수목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가꿀 수 있었을까 싶은데 그분은 해내셨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보며 그것이 진짜 이뤄질 수 있는 꿈이구나를 느낀다. 어르신들의 시간은 천천히 간다. 조급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오늘 내가 한 노력의 성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으면 이내 싫증을 내거나 답답해한다. 나는 이곳 제주에서 60이 조금 넘은 나이에 은퇴하시고 제2의 삶을 사시는 엄마로부터 지혜를 배운다. 어디서 가져오신 모종을 열심히 심으시고 물을 주신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내일 아침에라도 당장 꽃이 필 것 같고 마당 전체가 꽃으로 뒤덮일 것 같은 기대감에 꽃은 언제 피냐고 물어본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내년에 가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을 하시곤 한다. 이렇게 정성 들여 심었는데 내년에 가봐야 꽃이 필지 안필지를 알 수 있다고? 엄마에게 1년은 그 꽃을 피워내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행복이 가득할 것이다.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나를, 동생을 이렇게 키워내셨으리라. 하루하루 바쁜 일상 속에 그날그날 성과를 내야 하는 경쟁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엄마의 가드닝으로 꾸며진 이 공간은 전혀 다른 우주 같다. 내일 당장 피워낼 꽃이 아닌 다음 계절에서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꽃을 심으시며 심는 행위 자체에서 첫 번째 행복을 느끼고, 그것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또 행복을 느끼는 엄마를 보며 엄마의 노후를 이렇게 만들어드릴 수 있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나 역시 천천히 기다려보기로 한다. 업무 성과도, 아이들의 성장도, 아내와의 노후를 꾸리기 위한 약속도. 무엇보다 엄마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셔서 40년쯤 뒤 각양각색의 꽃들로 뒤덮이고 울창한 숲으로 변해있을 우리 집 정원을 기대하며.

수국이 활짝 핀 타운하우스. 이곳 수국길은 우리 타운하우스의 명소다. 땅의 산성도에 따라 다른 색의 꽃을 피워낸다는 수국을 보며 화려하면서도 겸손함에 감탄한다.


처음엔 눈에 보이는 한두 가지 종류 꽃이 이제는 십 수 가지가 넘는다. 로즈마리 같은 허브까지 키워내신다. 산수국, 치자나무, 애니시다, 란타나 등으로 뒤덮일 내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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