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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May 19. 2021

생애 첫 주택 구입기

건물주의 남편이 된다는 것은

* 맑은물어진별스테이는 아이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집 이름입니다. 돌고래와 (그렇게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올챙이는 각각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그린 그림입니다. 이 것은 집 간판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혜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주택자 혜택이다. 우리 모두 공수래공수거인 삶을 사는지라 태어나자마자 금수저 물고 부동산 부자가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역시 무주택자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는 매한가지다. 게다가 공무원(장교) 신분인 나는 생애 첫 주택구입 시 특별공급의 혜택까지도 볼 수 있는 운이 좋은 케이스에 속한다. 요즘과 같이 부동산이 이슈인 이 시기에 감사하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니 감사하고 그저 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아내와의 오랜 상의 끝에 이 꿀 같은 혜택을 포기하였다. 이 혜택을 포기하게 됨으로써 내가 볼 손해는 돈으로 따진다면 엄청난 손해였을 것 같다. 특별공급이 한창 주가를 달리는 요즘 신혼부부 특별공급(사실 이 부분은 3년 전 포기했다.), 공무원 특별공급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벌써 매우 좋은 조건을 포기한 것인 데다가 디딤돌 대출과 같은 저리 주택담보대출 역시 (무려 2%대의 대출금리다!)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는데 이것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정말 엄청나게 말렸다. 부모님께서 내 명의로 집을 해주신 적이 없어 38년 인생을 무주택자로 살아왔고, 아내 역시 동일한 관계로 37년을 무주택자로 살아왔으니 어찌 보면 이 순간을 위해 지난 38년을 집 없는 설움을 견디며 살아온 것일 수 있을 텐데 우리 부부는 왜 이렇게 쉽게 이런 혜택을 포기했을까.


제주도에서 지낸 지 1년이 넘어가는 시점 우리 부부는 제주도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복직을 한 후 바쁜 일상을 보내는 남편, 아빠는 아무래도 계급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인 장교로 계속 살아야 했기에 커가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아내에게 본의 아니게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1년의 육아휴직을 통해서라도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덮어보려는 가장의 발버둥은 육아휴직과 함께 끝났다. 감사하게도 아내 역시 그런 남편을 이해해주었다. 당연히 남편이 복직한 후 더 높아진 계급과 책임에 더 바쁠 것을 이해해주었고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오히려 등 떠밀었다. 1년을 쉬었으니 게다가 그 기간이 코로나로 인해 너무나도 어려웠던 시기였으니 가장 낮은 곳, 가장 힘든 곳에서 섬기겠다는 의지를 가진 남편을 최전방으로 보내줄 수 있는 아내가 너무 감사했다. 아이들은 아직까지 아빠가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적어도 제주도에서의 생활이 너무나도 즐겁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았다. 이 시기에 우리 가정 내에서 가장 금기시되고 가장 무서운 '볼드모트'와 같은 수준의 단어는 바로 '육지로 가자.'였으니까. 단순히 이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니지만 오랜 고민 끝에 제주에서의 삶을 결정하게 되었다.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려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제주에 살기로 결심하니 지금의 월세 살이를 끝내야 했다. 돈은 없지만 신분이 있는지라 신용은 있었다. 제주에서도 물론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지만 아파트를 구한다는 것은 제주에 남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최전방에 들어갈 남편에게 국가에서 허락해주는 아파트가 더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남편, 아빠 없는 아파트는 의미가 없기에 제주도에서 사는 의미를 가장 극대화시켜줄 전원주택을 구매해야 했다. 여기까지의 선택은 생애 첫 주택의 혜택 중 가장 큰 금액적 손해를 감수해야 할 특별공급의 포기를 의미했다. 온 국민 로또라고 하는 그 분양권을 포기한다는 것에 많은 분들이 반대를 하였지만 우리 부부의 논리는 이러했다. 첫째, 분양권을 딴다고 한들 완공되어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것. 둘째, 분양권을 따서 아파트를 얻는다고 해서 그게 가격이 올라 팔 것이 아니라면 의미 없는 데다가 가격이 올라 판다고 해도 요즘 아파트 거래 양도세 고려 시 실거주, 실보유 등의 조건이 있어 결국 떨어져 지내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나 하는 생각.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기간 동안 아이들이 다 커버린다는 것이다.


한국 나이로 각각 10살, 7살인 우리 아이들은 금세 자라나 버린다. 제주도에 왔을 때가 8살, 5살이었는데 작은애 기준으로 5살이 7살이 된 것은 사실 너무나 커버린 것 같아서 때론 섭섭하다. 가장 중요한 시기고 가장 왕성하게 꿈을 꿀 이 나이에 제주도에서 자연을 누비며 살 수 있게 해 줄게 아니라면 무슨 의미겠느냐. 결국 아파트 분양을 받고 실보유, 실소유 등 조건과 각종 혜택을 따져보고 제주도에서 월세를 내며 사는 비용 등을 모두 다 생각해보아도 '돌아올 수 없는 이 시간'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고 느꼈다. 나의 1년보다 우리 아이들의 1년이 상대성 이론으로 생각해도 너무나 값진 시간이기에 우리 부부 내외의 5~6년 뒤 상황이 아닌 아이들의 5~6년 후를 생각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포기한 것은 확정 지을 수 없는 돈이지만, 내가 얻은 것은 확정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우리 부부는 은퇴 후 제주도에 살기로 결심했다.


두 번째로 포기한 것은 생애 첫 주택 구매 시 얻을 수 있는 각종 혜택 중 디딤돌 대출과 같은 저리 대출과 취득세 감면 혜택이다. 제주도에서 전원주택을 구매하고자 하여 부동산에 올라온 많은 집들을 쫓아가 보았다. 일단 지역적으로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공동체 덕분이었다.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동체에 머무르기로 하였기에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골랐으며, 우리 부부 역시 이 곳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매물이 생각보다 많이 없어서 우리 여건 상 가능한 곳을 고르다 보니 15여 군데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어느 하나 마음에 쏙 드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홀로 노후를 맞이하시게 된 양가 어머니들의 삶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게 되어 두 분을 모시고 함께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이 점 역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웃사랑 실천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 부부에게 가장 중요한 이웃이며, 가족은 결국 부모님이고, 자녀들이었기에 어머니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우리만 생각하는 제주의 삶은 또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결국 어머니들이 같이 사시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하고, 가격이 너무 부담되지 않아야 했다. 조금 욕심을 내자면 타운하우스 단지가 예뻤으면 했다. 몇 가지 후보군에 올랐던 집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내쳐지다 보니 결국 끝내 집을 고르지 못하고 1년 살이를 더 하자고 마음먹을 무렵 기적과 같이 우리에게 한 집이 소개되었다. 다만, 이 집을 고를 경우 단독등기가 되어 있지 않은 공유 등기인 집이라 디딤돌 대출을 포기하여야 했고, 생각보다 큰 집 크기에 취등록세 감면 혜택도 포기해야 했지만 이 집을 본 순간 우리 가족 모두가 '바로 이 집이야!'라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집을 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단독 등기여부다. 제주도가 난개발을 하면서 타운하우스를 많이 짓다 보니 건축주가 땅을 통째로 사서 공유 등기로 지분을 나눠 팔아왔다. 그러다가 약 8년에 걸친 특별법에 의해 단독 등기로 필지를 분리해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게 작년 5월에 종료되었고, 이 집의 건축주분은 이래저래 사정이 안되어 단독 등기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단독 등기가 아닌 집을 살 때 건축주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매우 곤란한 상황이 올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건축주분은 너무나도 좋은 분이셨으며, 이 집을 사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난 후 우리 부부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엔 집 앞에 다른 집을 구매하셔서 펜션으로 운영하시다가 뒤에 큰 맹지를 어떤 부동산 업자분이 소개하여 구매하였고 3년 전 지금의 타운하우스 단지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정이 생겨 집을 내놓게 되었는데 그 집을 우리에게 소개해주신 분이 그 부동산 중개업자분이시다. 그리고 그 중개업자분은... 우리 교회 권사님이셨다.


표선으로 우리를 오게 한 것도 내 친구의 소개, 아내 친구의 소개와 더불어 바로 지금의 교회 때문이 가장 컸다. 이 교회 공동체에서 만나게 된 인연이 참으로 소중했는데 신자가 열 가정도 안 되는 이 작은 교회에 세 가정이 자녀가 있고 그 모든 가정에 큰 딸아이와 동갑인 친구들이 있었으며, 7명의 아이들이 모두 또래였다. 이 교회에서 만난 유일한 권사님과 새벽기도를 함께 다녔고 우리가 제주에서의 삶을 꿈꿀 때마다 응원해주셨다. 그러다가 이 집을 소개해주신 것인데 너무 좋은 조건으로 집을 내놓으셔서 처음엔 권사님도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실 정도였다. 구매할 수 있는 조건도 우리에게 딱이었지만 아무래도 부동산을 오래 하신 권사님께서는 우리가 특별공급이며, 생애 첫 주택 구매며 하는 혜택을 포기하는 게 안쓰러우셨나 보다. 더 꼼꼼하게 보라고 해주셔서 더 많이 공부하며 이 집을 구매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대하게 걸어갔다.


단독 등기 문제 역시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제주도에서는 현재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고 있는터라 확답할 수는 없지만 조만간 다시 특별법을 통해 단독 등기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단독 등기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내가 이 집을 구매함으로써 그 조건이 완비되었다. 여러모로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주택 구매를 할 수 있는 상황들이 눈 앞에 닥쳐오자 너무 급한 마음에 하는 것은 아닌지 아내와 결혼 전 우리의 삶부터 곱씹어보았다. 결혼 전 호기롭게 아내에게 결혼하면 집을 지어주겠노라 장담했던 나였다. 집을 짓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을 깨닫고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거짓말처럼 10년 차 부부가 된 지금 집을 지어주진 못하지만 집을 사줄 수 있는 순간이 왔다.


자녀 교육과 내가 해야 할 역할 등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 과정에서 전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료들 생각이 많이 났다. 그 모든 가정들이 행복하게 그곳에서 각자의 삶을 누리고 있겠지만 적어도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은 제주도에서의 삶을 좋아했다. 우리가 이 집을 구매한다면 전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료들의 가족들이 한 번씩 우리 집에 와서 머무르다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름 만족하며 삶을 잘 살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최전방에 있는 군인 가족들의 삶은 고되다. 그들에게 우리 가족이 줄 수 있는 최고의 호의이며, 전우들에게 내가 베풀고 싶은 마음,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집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다가구로 구성된 주택인만큼 어머니들이 거주하기에도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아무리 2층으로 나눠진 집을 구매하더라도 한 집일 경우에는 어머니들의 공간을 갖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다가구인지라 어머니들만의 별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점 역시 매우 만족스러웠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공부에 공부를 거듭하고, 대화에 대화를 거듭한 결과 우리가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복을 받았고 이것을 감사하게 받기로 결심했다.


결심이 서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유 등기인지라 주택담보대출이 어려운 조건이었는데 다행히 좋은 은행을 소개받아서 디딤돌보다는 높은 이자이지만 생각보다는 낮은 이자로 적당한 금액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나의 대출 상환 능력과 각오, 우리 가족이 집을 투기의 대상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 인식한다는 내용을 편지글에 적어 은행 지점장님께 보냈다. 모든 과정을 그렇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우리 스스로 되새기며 욕심이 아닌 선한 의도 안에서 해결하려 노력했다. 또한 어머니들도 오시면서 어머니들 몫으로 조금씩 보태시기로 하였기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쯤 되었을 때 아내에게 말했다. 집 명의를 아내 명의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결혼 10년 차에 아내에게 선물처럼 주고 싶다고. 여보가 집주인이 되라고. 나는 건물주의 남편이면 족하다고. 어차피 아내가 없으면 이 집도 의미가 없기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100% 아내 명의로 집을 구매했다. 아내는 담보인 나는 채무인이 되어 집을 구매했다. 구매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서류의 법적 근거, 각종 세금을 내야 하는 부분에 있었어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충분히 공부해서 지원해주었다. 아내가 내야 할 취등록세며, 어머니들께서 후에 도와주시면서 생길 증여세 문제까지 모두 준비를 해두었다.


 제주도로 이사한 지 522일 만에 우리 집이 생겼다. 아내는 태어난 지 13,100일째 되던 날 건물주가 되었다. 우리는 이 예쁜 집을 아이들의 이름을 따서 '맑은물 어진별 스테이'로 지었다. 등기 이전이 완료되고 서귀포시 건축과에 가서 동이름 변경 신청까지 완료하여 집 이름이 정말 '맑은물어진별스테이'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게 되면 주소가 저렇게 나올 것이다. 제주도민으로의 삶 2막이 시작되었다. 아직 이사는 다 하지 못했다. 사정이 있어 이사를 조금 미루었다. 오히려 이사를 준비하는 이 시간 우리 가족은 앞으로 새 보금자리에서 어떤 꿈과 추억을 만들어갈지 설렘과 기대 속에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앞으로 전방에서 나라 지키느라 여념 없는 동안 남편, 아빠, 아들과 떨어져 지내야 할 우리 가족들을 위해 이 집 이곳저곳에 나의 흔적을 남겨두기 위해 나도 고심 중이다. 많은 업체와 접촉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들어두었다.


최근 인플레이션 상승 등으로 인해 저금리 시대가 종료되고 고금리가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어려운 터널을 지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부처님 오신 날 휴무일이지만 종일 혼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알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제주 아쿠아플라넷에 방문하여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간간히 보내지는 사진과 아내가 올려주는 인스타그램을 보며 나 역시 즐겁다. 가장으로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여전히 우리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신앙과 추억'이므로 제주에서의 이 시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고 자녀들에게도 너무나도 중요한 성장 기간 최고의 환경일 것이라고 믿는다.



* 제주 아빠 브런치를 사랑해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응원 덕분에 저희 하보조(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족이 드디어 제주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제주 아빠 브런치는 앞으로 아빠의 육아휴직 기간 썼던 글과 더불어 주택 구매 이후의 삶에 대해 일부를 연재함으로써 첫 번째 제가 기획한 글의 연재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주에서의 삶에 대해 전해드릴 테니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시커멓게 햇볕에 그을리고 하루 종일 놀기만 하더라도 자연에서 마음껏 뛰노는 게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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