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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Jan 28. 2021

에피쿠로스가 옳았다.

책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에 대한 감상


 언어는 생각을 투영한다. 그렇기에 어떠한 단어를 선택하느냐 그리고 그 단어가 그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느냐는 것은 일종의 약속이고 집단사고의 결과물이다. 영어 단어 "Pleasure"을 누군가 "쾌락"이라고 번역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에피쿠로스의 철학, 에피쿠로스 학파(Epicurianism)를 "쾌락주의"라고 번역한 것이 문제다. 그가 주장한 선(善)의 즐거움(pleasure)을 번역하면서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서양철학의 정통성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여겨진 듯하다. 선비정신과 유교 사상을 이어받은 우리나라의 정신은 서양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의 철학자들에게 에피쿠로스는 플라톤, 소크라테스답지 않은 철학자라는 선입견을 줬을 것이고, 마치 노자의 무위자연처럼 공자와 다른, 정통적이지 않은 존재로 느껴졌을지 모르겠다. 그 결과 그가 말한 선(善)의 즐거움(BONUM VOLUPTAS을 영어로 번역하면 good pleasure이 된다.)이 어처구니없게도 "쾌락"으로 번역되었다.


당대 서양철학을 배웠던 전통 지식인들의 생각은 유교적이지 않은(고매하고, 정통적이지 않은) 다른 철학자의 사상을 이런 식의 단어 선택으로 그들의 생각을 투영했지 싶다. 결국 쾌락주의라는 단어의 저급함에서 오는 느낌 때문에 에피쿠로스도 소피스트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윤리, 도덕 시간에 이러한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온당치 못하다는 식의 교육을 받아왔고, 마치 요즘 날의 허무주의, 한탕주의에 빠진 도박, 마약쟁이들의 연속선상에서 에피쿠로스를 해석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금욕을 강조하고(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교육을 받아온 6차 교육과정의 피해자들) 개인의 행복과 감각을 추구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기능하고 인격을 갖춘 사람이 돼야 하는 "된사람" 신드롬이 휩싸여있었다. 알고 보면 이런 사람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국가도 구구절절 사연은 있다. 산업화의 빠른 발전에 맞춰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처럼 기계부품 같은 인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국가가 생존하는 방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사회가 강퍅해졌다. 좌우가 분열되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타인이 지옥이라는 동명의 웹툰이 큰 인기를 끌기도 한다. 코로나 19가 불씨를 던졌다. 활활 타오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능하는 사회 부품으로써의 개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코로나 이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부품으로써의 인간을 원했다. 마치 거푸집으로 찍어내듯 인간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올려놓고 재단했다. 그 과정에서 불신이 생기고 본디 자유로운 인간의 존재를 억압하고 억압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문제는 그렇게 삐져나온 악감정들이 안나 프로이트가 원한대로 '승화'되어 좋은 방어기제로 활용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에 타인이 지옥이 돼버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인간이 성장되도록 방치한 것은 누구일까. 왜 우리 사회의 공동체는 그런 역할을 해주지 못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찾아 떠난 인간들은 이곳저곳에 군집하여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삶의 터전을 다져나갔다. 아무리 사회가 그들을 재단하려 해도 그들은 재단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이다. 타인을 지옥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수용한 사람들이 있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에 간(間)은 사이 간자이다. 애초부터 인간은 상호 간의 관계에 기반한 존재들이기에 한자로 이렇게 지어지지 않았을까? 사람이 너무 싫어 세상에 등지고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조차 채워지지 않은 외로움이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만 회복될 수 있고 공동체를 찾아야만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온, 엄마의 품 안과 같은 아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 속에서 단련된고, 인간 속에서 치유되는 것이 현실적이다. - 248p


진중문고로 발간된 지 꽤나 된 책이었는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많고 오랫동안 공동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설계해 왔기 때문에 적잖이 두꺼운 책이었음에도 한나절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굳건하게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사람이다.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 제주도에서 살기로 결심하게 된 모든 과정에 공동체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다. 이웃이 얼마나 삶에 있어서 중요한가. 제주도에서 그런 이웃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의 제주 살이가 이어질 수 있었다 생각한다. 코로나 때문에 칩거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좋아서 함께 한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의 삶을 살면서 성장도 함께 한다. 갈등이 없는 게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는 오히려 갈등이 풍부하다. 다양한 갈등 속에서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배우는 곳이 공동체다. 요즘은 그런 것을 배울 기회가 도저히 없다.


지식이나 경험이 있어도 그것을 그렇다 하고 단정하거나 전제하지 않고 실제는 어떨까 하고 제로 영 零에서부터 탐구한다. - 370p


오늘날 세상은 모든 개인이 프로크루스테스인 것 같다. 자기만의 침대를 두고 모든 사람을 재단하려고 한다. 사회가 했던 역할이 개인에게 옮겨갔고 전체주의적 속성마저 띄고 있다. 이렇게 그들을 분노케 한 것이 무엇인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 관계의 해답을 줄 수 있어야 했는데 오히려 그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이용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이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리바이어던의 무섭고 커다란 이빨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공동의 적을 가진 존재들이 동맹이 된다고 하는 국제정치의 원론과 같이 사회도 공동의 적을 양산해냄으로써 버티고 버틴다. 하지만 이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오히려 또 다른 해결되지 않을 갈등만 야기할 뿐이다. 남는 것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사고와 생김새를 가진 로봇의 세상이 오거나, 더 이상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고독의 세상이 오거나.


아이에게조차 어떤 관념을 강요하지 않는다. - 371p


공동체는 해답이다. 에피쿠로스는 진즉에 이 진리에 가까운 인간의 본질을 알아차렸다. 고매하고 정통성 있는 철학도 좋지만 결국 그마저도 배타적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위대하지만 알고 보면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을 우매한 사람으로 만들어내는데 불과했다. 소크라테스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우매한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매한 사람도 없고 소크라테스도 없을 순 없는가. 그냥 각자의 개성을 간직한 채로 마음껏 나누고 마시며 들어주기만 할 수는 없는가. 꼭 상대방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는가. 꼭 내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하는가. 공동체는 이 모든 질문에 선의 즐거움을 경험해보라고 그저 조용히 미소 짓는다. 네가 존재하기에 나도 존재한다. 우분투는 공동체 정신의 진수라고 하겠다.


가정은 가장 작은 공동체 중 하나다. 이 기초가 되는 공동체부터가 무너지고 있는데 하물며 친족, 마을, 도시는 어떻겠는가. 귀를 기울여보자.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바라보자.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자. 황희 정승은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고 했다 한다. 자기들의 세계에선 다 옳다. 그 옳은 사람끼리 모여 살아보자. 공동체 정신은 지금의 사회를 단합시킬 해법은 아니다. 상처를 주지 않고 행복하게 자신의 살아갈 해법이다. 통합, 연합과 같은 단어는 결국 또 전체주의를 낳는다. 공동체 역시 자칫 전체주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추구하는 목표가 그저 삶이라면. 시간이라는 오선지 위에 그려진 생이라는 음표로 만든 삶이라는 악보라면 그 누구도 타인의 음악을 침해할 필요도, 편곡하려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책을 다 고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읽은 '김지은입니다.'의 저자 김지은 씨에게도 공동체가 오직 해법이라는 생각을 전하고 싶어 변호사님을 통해 책과 응원을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그에게 닿았을진 모르겠다.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공동체인 아내에게 제일 먼저 추천했지만 표선도서관에선 아직 이 책을 구할 수 없어서 도서관에 구매 신청을 했다. 그리고 나의 공동체들에게 계속 권하고 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특히 이 책을 권하고 있다. 답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이 싫어서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사람을 만든 세상이 원흉이고 우리는 모두 함께 그 세상을 이겨내야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보길 권한다. 마침 아이유의 신곡 'celebrity'가 내 생각을 오롯이 반영해준다. 주류라고 생각하는 분노자들이 모르는 진실은 사실 공동체로 살아가는 비주류의 그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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