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주 아빠 May 31. 2023

여기는 매일 팟럭(Potluck)을 합니다.

진정한 유러피안의 삶을 한국에서 구축하기.

* 팟럭(Potluck) 파티는 서구권에서는 흔한 모임입니다. 각자가 음식을 챙겨 와서 서로 나누어 먹는 친교 모임입니다.


 육아휴직 후 제주도에서 1년 살이를 한 후 예전부터 꿈꿔왔던 일을 지금 당장 실현시켜도 좋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코로나19로 인해 그 확신은 더욱더 강해졌기에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없었다. 부모님들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같이 사실 분 내려오시라는 반강제적 제안을 드렸는데 엄마가 흔쾌히 합류하시겠다고 하여 3대가 모여 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결국 제주살이 1년 반 만에 제주에 자가를 구하여 살기 시작했다. 4년이 흐른 지금 우리 가족은 이제 확신을 넘어 이 문화를 전파해야겠다는데 이르렀다. 우리는 총 9채의 다가구주택이 모여 사는 타운 하우스에 살고 있다. 우리 집은 건축법 상 단독주택(다가구주택)으로 분류되는 흔히 말하는 전원주택인데 우리는 스스로 전원주택에 산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을에 산다고 말한다. 마을. 참으로 정겨운 단어다.

주 당 노동 시간이 가장 적은 유러피안들은 늘 저녁이 있는 삶을 공동체와 함께 즐긴다. 국가가 부유해서라기보단 여유를 부릴 줄 알아서 부유한 게 아닐까?

살아간다면 유리피안처럼

 어릴 때 책을 보면서 늘 생각한 게 왜 서구권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은 이렇게 다를까였다. 서양의 책들은 모험에 관한 책들이 많았다. 피터팬, 파리대왕,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등 늘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뤘다. 그에 반해 한국 문학이라고 한다면 한의 문학이다. 심청전, 홍길동, 장화홍련, 상록수 등 고전 문학부터 근현대 문학까지 늘 한이 서려있고 계몽에 관한 이야기였다. 문화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우월하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모험을 좋아하는 타입이라 서양의 책들이 더 재밌어서 많이 읽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20번쯤 읽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서양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늘 궁금했고, 환상이 있었다. 그렇게 간직해 온 환상이 눈앞에 현실로 목격되는 순간은 신혼여행 휴가 때였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3개 국을 돌아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아야지라고 결심했다. 특히 인터라켄 호수 주변을 따라 있는 집들에서 오후 6시쯤 되면 모두 마당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고, 호수에 바로 몸을 던져 헤엄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 저게 삶이지!'라고 생각했다.

시골에 살면 도시에서 시간 내서 가야 하는 여행지가 늘 내 옆에 있다. 틈만 나면 산으로 들로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었다.

한국에서 유러피안의 삶을 구축하기

 장교로서 한국에서 살아간다면 유러피안의 삶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더욱 좋은 기회였다. 일이 바쁠 때야 어쩔 수 없고 비상근무도 많은 편이지만 틈이 날 때마다 관사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캠핑도 다녔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강제적 거주를 해야 하는 환경 역시 그렇게 살기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종종 유러피안의 마인드를 갖고 계신 지휘관을 만나면 지휘관 관사로 부대원들과 가족들을 초청하여 가든파티도 열곤 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역시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 주택이어야 한다는 확신과 더불어 공동체의 삶이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런 공동체의 삶을 가장 이루기 쉬운 게 또 군인 가족들의 삶이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층간 소음이나 여러 마찰이 아파트 단지 내에서, 통로에서, 놀이터에서 생기는 게 요즘 시대다. 하지만 군인 아파트, 관사 지역은 생사를 함께 하는 전우들의 생활 터전이라 가족들끼리도 웬만해선 서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함께 잘 지낸다. 특히나 종교가 있는 경우는 더욱 돈독해진다. 다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장교는 너무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웃과 함께 친해지고 같이 어울려 지낼만하면 헤어져야 했다.

아파트지만 마당이 있던 이곳에서 늘 이웃과 함께 저녁이 있는 공동체의 삶을 즐겼다. 야외 영화관이고, 파티장이며, 캠핑장이 돼주었던 소중한 공간이다.

내가 직접 공동체를 꾸리는 것은 어떨까?

 잦은 이사로 많은 이별을 겪으면서 우리가 꿈꾸던 유리피언의 삶은 단순히 주택에서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공동체의 삶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계급이 높아질수록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하는 나야 어쩔 수 없다지만 가족들까지도 그런 피로를 감당시키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전에서 1년 간 교육을 받으며 작고 비좁은 아파트지만 너른 마당을 함께 공유하면서 수시로 마당에서 함께 팟럭을 즐겼다. 하지만 너무나 좋은 이 순간이 곧 끝날 것이라 생각하니 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삶을 늘 꿈꿔왔기 때문에 헤어짐이 아쉬웠고 무엇보다 이런 모임이 가족을 더욱 돈독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다짐했다. 좋은 보직을 제안받았지만 뿌리치고 육아휴직을 썼다.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일들을 실현시키기 가장 좋은 곳은 제주도라는 생각에 들어 제주에서 1년을 살아보자고 했다. 그렇게 제주로 왔고 제주에 온 지 두 달 만에 코로나가 터졌다. 하지만 작은 타운 하우스 안에 모여 사는 이웃들끼리는 코로나라고 할 게 없었다. 전국에서 코로나를 피해 제주로 오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기회가 생기는 것은 덤이었다. 마치 데카메론의 현실판을 보는 것 같았다. 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마음도 넉넉했고 너른 마당에서 함께 즐기는 시간들은 모두에게 안전한 쉼을 제공할 수 있었다. 1년 살이기 때문에 떠나야 하는 이곳에서 나만의 공동체 문화를 시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좋은 이웃 공동체에 필요한 것들을 연구했다.

마을 아이들에 더해서 옆 동네 아이들까지 모여 모두 함께 커 나간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함께 키운다는 옛말이 이곳에서 현재형이 된다.

공동 육아, 공간 공유, 베풂 그리고 여유

 좋은 이웃 공동체는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세네카의 행복론이나 에피쿠로스의 쾌락 이론에 따르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복은 좋은 공동체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나 역시 그에 깊이 동의하는 사람이다. 특히 네 가지 사랑 이론에서 필리아적 사랑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필리아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이웃을 가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좋은 배우자를 두었으니 이제 좋은 이웃만 둔다면 내 삶은 더 이상 바랄게 없이 행복할 것이었다.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웃들이 모두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공동 육아가 되는 것이 중요했다. 공동체에서 아이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젊은 세대들의 공동체는 대다수가 술 파티와 같은 자극에 집중된다. 하지만 양육자들의 공동체는 건설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그 가운데에 선한 영향력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 또한 공간을 공유할 수 있어야 했다. 공간을 공유하기 위해선 울타리가 없는 마당을 가진 주택이 필요했다. 아파트와 같은 환경에서는 도저히 그런 환경이 나올 수 없었다. 가끔 아파트 놀이터에서 이웃들이 함께 모여 수다 떨고 도시락도 먹고 하지만 공간을 공유하는 수준은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애초에 팟럭을 하기 위해서는 게스트들이 모일 충분한 공간이 필요했고 그것이 누군가가 독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베풂이 중요했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의 삶은 베풂이 필수적이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계속 제공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반드시 피로가 쌓이고 결국 어느 순간엔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베풂을 통해서 모두가 나누는 것이 일상이라면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모임이라면 이 공동체는 분명 지속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여유가 필요했다. 한국인들은 너무 바쁘다. 너무 바쁜 나머지 노는 것도 전투적이다. 술을 왕창 마셔서 빠르게 취하고 숙취에 허덕이는 문화는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었다. 반면에 여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은 놀이 자체도 여유로웠다. 마당에서 밥을 먹다가 여유롭게 합류해서 갑자기 팟럭이 열리기도 하고, 내일 또 만날 것이라는 여유가 있으니 굳이 오늘 끝장을 보겠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인생을 길게 볼 줄 아는 넉넉함 때문에 늘 경청이 습관화되어 있다. 누구 하나 잘났다고 자신의 말만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황희 정승 마냥 이 사람 말도 맞고 저 사람 말도 맞다고 생각하며 삶 자체에서 모두가 여유 부릴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했다. 그리고 공유 지분의 타운 하우스에 거주한다면 니 땅, 내 땅 나누는 욕심쟁이가 존재하는 순간 그 공동체는 무너진다. 주차장 문제로 싸워야 한다면 어찌 공동체가 되겠는가. 여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넉넉함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선 네 것 내 것도 누구의 순번 같은 것도 없다. 물질적인 가치에 목매달기보다는 나눔을 통해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기로 한다.

만들어 볼까? 이웃 사랑 공동체

 이사를 마친 후 제주에서 유명한 떡집을 찾아가 맛있는 증편을 예쁘게 담아왔다. 리모델링을 해야 했기에 공사 간 소음 발생과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다는 부분에 양해를 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함께 전달했다. 또한 열린 공간에 모두를 위한 대형 트램펄린을 설치했다. 안전 당부 외에는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먼저 다가갔고 적당한 거리 두기로 그들을 기다렸다. 타운 하우스 내에는 펜션으로 운영되는 집이 몇 채 있었는데 그곳에 오는 손님들도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어울렸다. 아이들이 오면 얼마든지 트램펄린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고, 휴가철 한 여름밤의 꿈을 꾸는 아이들에게 많은 레크리에이션을 제공해 주었다. 마침 표선이 IB 교육 특구가 되어 초등학교가 하나 둘 IB 학교로 지정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손님으로 오셨던 분들이 우리의 삶의 방식에 관심을 갖고 IB의 가치관에 매료되어 제주에서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2년 여의 시간 동안 천천히 하지만 강렬하게 우리의 삶이 가진 선한 영향력을 널리 퍼뜨렸고 그것에 반응한 이웃들이 손님이 아닌 입주민이 되어 완전한 이웃이 되어 갔다. 우리 마을에 살지 않는 이웃들 중에서도 교회에서 만난 좋은 이웃들이 이 공동체에 편입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교인 이웃들이 이 공동체의 시작점에서 좋은 첫 단추가 되어 주셨다. 그들은 공동 육아, 공간 공유, 베풂과 여유를 모두 가지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이웃 사랑 공동체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더해져 오랜 친구까지 제주에 내려오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공동체가 구성되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들은 의외로 관계에서 오는 피로함이 제일 크다고 한다. 애초에 어울리지 않아도 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웃 사랑 공동체는 결코 배타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삶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뜻이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려도 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너른 마당, 대형 트램폴린, 매일 열리는 축제, 아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놀아주는 부모들. 아이들에게 좋은 것은 부모들에게도 좋다. 지상 낙원은 이런 풍경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의 천국, 부모들의 낙원

 지금 우리 마을에는 무려 12명의 아이들이 함께 살고 있다. 어린이집을 다니는 어린아이 2명을 제외하면 10명이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니고 아침 스쿨버스를 타러 가는 풍경부터가 너무나도 정겹다. 방과 후에는 매일이 운동회다. 너른 공간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웃고 마음껏 떠든다. 그렇게 정신없이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부모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집으로 들어와 저녁 먹기를 권유하기보다 주섬 주섬 저마다 집에 있는 것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 집에서 불을 피우면 모두가 그 집 마당에 모여 팟럭이 시작된다. 매일 지글지글 불판에 고기가 구워지고, 9첩 진수성찬이 차려지며, 밥 좀 먹어라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꿀떡꿀떡 넘기는 아이들을 보며 이곳에 천국이구나 싶다. 그런 아이들인지라 생각도 마음도 신체도 쑥쑥 자라난다. 아이들 역시 학교 이외의 공동체에서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배경을 배우고 성장한다. 춤추고 노래하며 마음껏 떠들어도 그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층간 소음도 없고 주차난도 없다. 부모들은 그 사이 저마다 손에 마실 것들도 챙겨 온다. 술을 좋아하는 부모는 적당한 반주를 즐기고, 술을 마시지 않는 부모라면 가져온 음료수로 낭만에 취한다. 즉흥적인 모임에서 격식도 없고, 규칙도 없다. 그저 각자가 원하는 만큼 즐기고 행복하고 나누면 그만이다. 여유 넘치는 부모들이 모인 이곳이 낙원이다. 옆 타운 하우스에서 이사하자마자 주차문제로 서로 다퉈서 그 이후로는 아예 얼굴도 보지 않고 마당을 사용하지도 않으며, 담을 짓고 살다가 결국 제주 살이가 안 맞다며 육지로 떠나간 사람들 이야기도 들린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 중에 거인의 정원이라는 동화가 있다. 아름다운 정원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거인 때문에 정원에 찾아오는 이가 없어진다. 새도 동물도 오지 않으면서 정원의 식물들은 죽어간다. 아름다운 공간을 독차지하면 그 공간은 죽은 곳이 된다. 공간은 늘 열려 있어야 하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와 같은 상황에서도 공간은 늘 열려 있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마을이었다.

저마다의 요리솜씨를 뽐내며 팟럭을 준비하는 어른들. 사람이 많지만 모두가 나누어 먹을 것이기에 넉넉하다. 아무것도 아닌 날도 늘 파티다. 늘 축하와 감사가 이어진다.

사람에게 필요한 땅의 크기는?

 인간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 모두가 하늘 위로 치솟는 고층의 아파트에 살다 보니 강퍅해지기 일쑤다. 지금의 세상사는 뾰족뾰족 아파트를 닮았다. 결국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대끼며 위로 올라가야 하는 현상은 양보할 수 없는 작은 마음을 만들었다. 인간의 마음은 물과 같아서 담는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넉넉한 인심이라도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좀체 인심 좋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의 환경이 여유로운 사람들에게 더 베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 인식에 전원주택은 그저 비싸기만 한 사치스러운 곳이라고 인식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 째는 아파트처럼 가격이 오르지 않는 주택의 특성, 둘 째는 건물을 관리해야 하는 소요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선입견이다. 집은 값이 올라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나의 가치관과 삶을 표현하는 도구다. 결국 돈 때문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돈으로 규정될 것이다. 주택을 관리해야 하는 소요는 분명 비용과 노력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집을 내가 가꾸며 사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우리에겐 도대체 얼마나 넓어서 관리가 어렵다고 할 정도의 땅이 필요한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가정에게 있어서는 거실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볼 때 아이들이 뛰노는 장면이 보일 정도의 넓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우리 마을처럼 담벼락이 없다면 옆 집의 마당도 우리의 마당이고 우리의 마당도 옆집 아이의 마당일 수 있으니 십시일반 모아진 마당들은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어 놓을 수 있는 충분한 개방감을 선사한다. 중요한 것은 땅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베풀 수 있는 마음의 크기일 것이다.

심지어 기술도 베푼다. 벽면 크랙을 보수해 주고, 수도 설비를 도와주신다. 아무리 큰 것도 나눌 수 없다면 의미 없다. 나눔을 통해 진정 더 큰 연결을 갖는다.

삶의 정수 공동체

 마을에 살고 있다. 9채의 주택이 오밀조밀 모여서 함께 이웃 사랑 공동체를 이뤘다. 아이들이 크면 이곳을 떠나는 주민도 있을 수 있고, 계속 남아있는 주민도 있을 수 있다. 떠나건 남아있건 이 시절 함께 했던 그 정겹고 흥이 넘쳤던 추억은 모두가 간직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용기를 줄 것이고, 희망을 줄 것이다. 참으로 피로하고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소유와 연결되어 있는 이치 속에서 소유가 아닌 존재를 택한 사람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을에 마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 사는 곳에 마찰과 갈등은 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함께 머리 맞대 극복해야 할 작은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잔잔한 파동은 때로는 적당한 긴장감으로 우리에게 공동체의 소중함을 더욱더 느끼게 한다. 공동체의 삶은 나눔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육체적 욕망을 충족하기에 아포니아를 이루고, 선한 영향력이 오가는 아이들과의 놀이와 이웃 간의 대화를 통해 영혼이 동요하지 않아 아타락시아를 이룬다. 작게는 가족 공동체부터 넓게는 마을, 사회, 지구 시민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공동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어떤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절름발이 같을지 모른다. 완벽한 사람 하나 없고, 조금씩 부족하고 서툰, 상처도 있는 사람들. 시골에 처박혀서 그렇게 사는 것이 꼭 배포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도시인들은 비난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오늘 우리에겐 고된 하루를 즐거움으로 바꿔 입안에 털어 넣을 약간의 술과 음료가 준비되어 있고, 누가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나뉠 몇 가지의 음식이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나눌 우리 이웃. 공동체가 있다. 우리는 한 마을 사람들이다.

거주민도 있고, 세입자도 있지만 모두 이웃이다. 각자의 작은 땅을 서로 모아 큰 공동체를 이루었다. 촌스러운 시골처럼 보이지만 유러피안의 삶을 사는 곳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한국인들은 유독 전원주택을 싫어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