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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May 29. 2023

왜 한국인들은 유독 전원주택을 싫어할까?

건축물은 곧 삶에 대한 철학을 반영한다.

* 사진: UnsplashAbbilyn Rurenko


 모든 인간은 권력을 숭배한다. 본능적으로 권력 집단 안에 머무름으로써 안전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인간이 고등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신체적으로는 그 어떤 무기도 갖지 못한 나약하기 그지없는 동물로서의 생존에 대한 욕구의 본성이 각인된 결과이다. 이로 인해 가장 창조적인 인간에게 가장 창조적이지 못한 현상이 하나 생겼다면 바로 의식주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중에서도 특히 주거에 관해서 다뤄보려고 한다. 필자는 건축학도도 아니고 건축에 대해 배워본 바도 없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특히 건축물과 설계된 공동체의 형태가 곧 인간의 사유를 지배한다는데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인류사는 소수의 천재에 의해 지배되는 지배 - 피지배 현상의 수없는 부침의 과정이다. 동시에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달래기 위한 어느 정도 합리적인 수준의 정책을 제공해야 했고,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지금의 세기는 지배 - 피지배 현상이 어느 정도의 합의점을 찾은 역사상 가장 균형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모든 나라에서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의 정치적 형태에 따라 조금씩 상이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국가에 종속되지 않고 나름의 환경을 찾아서 떠나려는 사람은 늘 전체 인구의 약 3% 수준이 있어 왔다고 한다. 한 국가가 가진 지배계층의 철학에 반항하는 반골들이 늘 이 정도의 인구 비율을 가졌다는 게 참 재미있다. 그중 일부는 그 철학을 바꿔놓는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나 대다수는 그저 자신의 삶이 행복한데 만족하며 지낼 수도 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범주를 떠나 마치 자연의 법칙과도 같이 인류사 내내 있어온 현상일 뿐이다. 전원주택에 대해 얘기하는데 권력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은 너무 멀리 간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거의 문제는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했고, 결국은 어떠한 통치자가 되었건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 결국 그 정권이 존속할 수 없었다는 역사의 기록만 보아도 이것이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고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Chat-GPT, Bard 등 인공지능 모델과 각종 통계 등을 확인해 본 결과 전 세계 인구의 61%가 단독주택에 거주한다. 우리나라 건축법상 단독주택에는 흔히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전원주택부터 다가구주택까지 포함된다. 세계의 기준도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건축법 상 기준의 단독주택과 동일한 형태가 전 세계의 과반수라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파트(영어로 Apartment라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인식하는 아파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건축법상 공동주택 - 아파트, 빌라 등 의 한 형태를 의미하는 아파트를 이해하기 쉽도록 이 글에서는 다세대 주택, 공동주택을 아우르는 말로 사용하였다.)에 거주하는 인구는 27%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만 놓고 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2020년 기준 약 75%의 인구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OECD 기준) 이는 전 세계에서 압도적인 1위의 비율이다. 2위는 스페인으로 약 66.1% 수준이다. 도대체 왜 유독 우리나라는 이렇게까지 아파트가 보편적일까? 왜 이렇게까지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보편화된 주거 형태로 아파트가 정해진 데는 근현대사의 비극이 숨어있다. 더불어서 현재의 모습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의 형태와 맞물려 고착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나는 의문을 품었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도의 설계에 의해서 우리는 그렇게 살게 되어버린 것일까? 인간의 사유는 마치 물과 같다. 어떠한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변한다. 우리가 스스로 그 그릇을 만드는 사유의 주체자가 된다면 문제가 없지만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그릇에 우리의 사유를 집어넣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저항이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오랜 시간 상호 간의 약속된 합의점에 도달하면 그저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사유를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애초에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냈다면?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병 안에 갇힌 램프의 요정 지니와 다름없는 신세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라고 불리는 충청 아파트. 당시 최신식 모더니즘 양식과 더불어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축물이다.(나무위키)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거주 형태가 아파트가 된 데에는 3가지 대표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근현대사의 비극이고, 둘째는 피로 사회, 셋째는 질문 없는 사회라는데 있다. 이 세 가지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모두가 녹록지 않은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왜 도대체 대한민국은 이렇게 힘들고 슬픈 나라가 되었을까?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는 전 세계에 10위권에 달하지만 행복 지수(UN의 지속 가능한 개발 솔루션 네트워크에서 소득, 사회적 지원, 자유도, 관용, 건강 등을 점수화하여 발표)는 무려 56위권이다. 반드시 경제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을 지수화한다는 것이 다소 추상적인 개념일 수 있지만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놓고 봤을 때 우리는 어떤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상위의 욕구가 잘 해결될수록 우리는 더 행복한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최상위 욕구는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사회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도대체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아실현을 잘하지 못할까? 자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서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우리나라의 비극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은 반만년 역사를 지닌 유구한 전통의 국가이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추종하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나라다. 정말 자랑스러운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진 자긍심일 뿐이다. 세계 속의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래튼 우즈 체제 하에 발명된 신흥 독립국이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성공한 국가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반만년 역사의 과정이 단절된 근현대사에 대해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선비의 나라 조선은 세기말 쇄국 정책 등을 통해 중요한 세계화의 흐름을 놓쳤다. 결국 우리가 모두 아는 국치를 겪었다. 그 와중에 나름대로 지배계층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 노력을 하였으나 힘없는 제국은 당시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강대국들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국가 발전을 이룩하고 그 결과물을 잘 쌓아온 서구 강대국의 등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 당시 서구권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소위 말하는 멧집이 있는 상태였다. 그 시기에 전 세계는 모두가 힘들었다. 하지만 시민도, 지배계층도 모두 그것을 버틸 힘이 있었다. 처칠이 피, 땀, 눈물을 외쳤을 때 영국 시민들은 환호했고 마땅히 전쟁에 참전했다. 시대의 흐름을 잘 탄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가진 근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미카제 특공대 같은 황국 신민으로서 말도 안 되는 잔혹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역사의 큰 변곡점에서 매듭을 잘 지어냈다. 그 결과 지금의 주요 경제 강대국은 당시 세계 대전의 주관자였던 국가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는 서로 싸운 나라끼리 모두 강대국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만큼 근현대사는 지금 세계 질서의 근간이 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 대한제국은 어떠했는가. 찢어지게 가난한 국가였는데 벼룩에 간을 빼어먹는다고 일제의 수탈까지 겪었다. 그 과정에서 그 어떠한 사상적, 기술적 발전을 겪지 못했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하고 아주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의식주 문제였다. 그중에서도 주거의 문제인데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 때 일부 서양식, 일본식 건물들이 들어온 것을 제외하면 당시 백성의 상당수가 초가집에 거주하고 있었고 사회적 인프라라고 하는 것이 전무한 상태였다. 전기, 수도, 통신과 같은 인프라를 상상할 수도 없는 후진적 도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심지어 수도 한성부에서도 화장실이 없어 마을 한가운데 하천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물줄기가 공동 화장실인 수준이었다. 모든 거주 형태는 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바로 마당과 집으로 이어지는 초가집(조금 사정이 나은 기와집이라고 하더라도 큰 틀에서는 비슷한 수준)이었다. 

맨해튼에 지하철이 들어설 때 조선의 저잣거리는 이런 모습이었다. 지도자의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사진 : 정은문고 - 우아한 루저의 나라)

그 와중에 한국 전쟁으로 인해서 국가가 초토화가 되었다. 이후 국가가 재건되는 데 있어서 먹고살기 위해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인 바로 이 주거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였는데 이는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해결한 방법과 유사한 방법이었다. 바로 공동주택을 짓는 것이었다.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창안한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형태를 띤 공동주택. 바로 지금의 아파트가 대거 건축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은 전에 없던 엄청난 편리성을 경험한다. 공동주택이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인프라를 갖추기가 용이했다. 수도, 전기, 가스 등이 단지 내에 한 번에 들어오고 모든 가정마다 물이 이상 없이 나오고 난방을 갖췄으며, 밤에도 환한 빛을 낼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 국민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인프라라는 것을 경험해 보며, 주거지 다운 주거지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구는 사정이 달랐다. 전쟁 이후 잠시나마 공동주택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이미 오래전 단독주택과 같은 주거 형태에서도 충분히 그런 인프라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금 단독주택으로의 회귀를 희망했고, 재건 이후 빠르게 도시가 재편되었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도시의 주택단지들은 인프라를 갖췄기에 다시 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 창조해내야 했던 대한민국과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이는 유럽과 미국의 도시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랜 시기 문화, 권력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유구한 역사의 유럽 도시들은 중심부에 대다수 주택이 있다. 공장과 노동자들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있는 형태다. 미국의 경우 초창기 가난한 노동자들이 뉴욕과 같은 대도시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고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부의 불균형으로 인해 결국 부자들은 그들만의 안전과 문화가 확보된 지역을 만들어갔다. 지금 미국은 주요 도시의 중심부가 복잡하게 얽혀 부와 빈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결국 진짜 부자들은 도시의 조금 외곽 지역에 타운 하우스 형태의 거주지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도 어찌 보면 미국이 단기간에 이뤄낸 결실의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속도가 매우 느릴 뿐이라는 것과 부자들이 아파트에 안주함으로써 도시 외곽으로 부가 이동하는 현상이 정체되어 버린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편리한 주거 형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주거 형태는 아파트라는 인식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인식이 과연 변할 수 있을까? 요원한 일이다. 지금도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나에게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물어보는 질문은 관리비에 관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대다수 전원주택은 여전히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가스비가 비싼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기, 수도는 문제가 없다. 통신도 문제없다. 오히려 공동 전기료, 공용 시설 사용료 등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한 달 관리비를 놓고 비교해 보면 그렇게 차이가 없다. 월 2~3만 원 수준의 비용이 더 발생할 뿐이다.(우리 집의 경우 전기레인지를 사용하며, 300kw 태양광 발전 시설을 갖춤.) 하지만 사람들 인식 속에 단독주택은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인식이 DNA처럼 각인되어 있어서 비교 설명을 해줘도 믿지 않는다. 이미 마음의 벽을 치고 있는 것이다. 뼈아픈 근현대사의 가난을 겪은 대한민국 국민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신포도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며 인프라에 관해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존의 인프라는 편의성이 중요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며 인프라만큼이나 중요한 개념이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공간에 대한 개념이었다.

단독주택의 관리비가 더 비싼 것은 사실이다. 공동으로 할 수 있는 부분(전기, 정화조, 보험 등)을 개인이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용이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피로한 사회다. 일을 정말 많이 한다. 전 세계 주요 경제국가 10개를 비교해 보면 주당 노동 시간이 영국은 34.1시간으로 가장 짧고 우리나라는 인도, 중국에 이어 46.3시간으로 7번째로 길다. 주요 10개국 중 아시아인들이 평균적으로 더 긴 시간을 일한다는 것도 눈여겨볼 문제다. 영국과 비교했을 때 일주일에 12시간 더 일한다는 것은 거의 매일 2시간 이상 더 일한다는 것이다.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 기준 영국은 약 7시간, 우리나라는 약 9시간을 일하는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직장인들의 대다수는 9시간 밖에 일을 안 한다고?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정말 일을 많이 하는 나라다. 이렇게 일을 많이 하는 국민들이 사는 나라일수록 도시화가 유리하다. 매일 아침 러시 아워에 노동자들은 일터로 몰려든다. 이를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을 운송할 교통 시스템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들을 수용할 일터(사무실)가 확보되어야 하고, 그들을 먹여야 하고, 상호 간의 거래를 위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에서 도시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 비율은 66%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극복하면서 인간은 공간을 가진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고밀도의 도시화는 코로나19와 같은 집단 감염병에 매우 취약한 구조라는 것을 알고 발달된 산업일수록 재택근무와 같은 공간을 분리하는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공간의 개념은 시간의 개념과도 연결된다. 나의 공간을 갖고 싶다면 그 공간을 관리할 시간 혹은 재력이 있어야 한다. 보통의 노동자가 그것을 재력으로 해소하기는 어려우니 보통은 시간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피로 사회인 대한민국 시민은 그것을 관리할 시간과 여력이 없다는 데 있다. 결국 우리는 공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단독주택에 산다는 것은 인프라면에서는 예전보다 확연히 좋아졌지만 여전히 그 공간을 관리하는 면에서는 비효율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서구권은 단독주택의 거주 비율이 우리나라보다 높을까? 영국에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코로나19 때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더 높았다고 한다. 우울증 등의 정신적 고통을 겪는 비율의 80%가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 거주자였는데 더해서 저임금 노동자(특히 아시아계)의 경우 단독주택에 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영국식 정원이 각광받으며 공간의 중요성이 재조명될 때 사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공간을 마련할 능력이 안되었던 것이다. 영국의 주 단위 노동 시간이 가장 짧다는 것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그들은 그것을 관리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펜데믹 기간 유튜브 등에서 영국식 정원 사용법과 같은 영상이 많이 올라왔다. 수영장을 짓는다거나, 정원에서 산책을 한다거나, 가족들과 티타임을 갖는 등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삶을 영국의 일반 소시민들은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부자들이 더 비싼 아파트에 거주한다. 그 비싼 돈을 주고 아파트를 구매하는 것이다. 물론 최상위급 재벌은 아파트에 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권력자들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공관은 전원주택의 형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다수 부자들은 아파트에 거주함으로써 아파트가 더 고급스러운 주택이라는데 환상을 갖게 만드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나마 넓은 평수를 지녔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느 정도의 공간 확보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나라 표준 전용면적 85㎡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에 없던 스트레스를 겪어야 했다. 전원주택에 산다고 하면 두 번째로 많이 듣는 질문이 잔디 관리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정원과 잔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하지만 정원도 잔디도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 둔다면 그렇게까지 관리가 어렵진 않다. 우리 집을 예로 들자면 대지 면적 약 220평에서 잔디가 차지하는 것이 약 150평 정도다. 하지만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우리 집 마당에는 잔디가 자랄 틈이 없다. 잡초가 자랄 틈이 없다. 마치 등산로에 풀이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국 사람들이 상상하는 정원에는 마치 베르사유의 궁전과 같은 엄청난 잔디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이 살면 관리가 어련히 알아서 된다. 오히려 자투리 땅에 어머니가 꽃을 심이서 꽃밭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리의 영역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취미의 영역으로 봐야 할 것인가. 바쁜 일상 속에 우리는 제한된 취미와 한정된 시각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전원주택에 살며 내 땅을 소유하고 그곳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조차 관리의 영역 안에 두고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냐고 묻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원은 관리의 영역이 아닌 취미의 영역이고 이웃과 연결되는 관계의 영역이다. 어떻게 가능했냐고? 간단하다. 일할 시간을 줄이면 된다. 조금 일하고 많이 놀기. 그것이 인류가 지향하는 바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조금 일하면 직장에서 어떻게 버티냐, 돈을 조금밖에 못 버는데 어떻게 하냐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가능한 이유들이 이어진다.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면 그것을 할 방법을 찾지 안될 이유와 핑계를 찾지 않는다. 중요한 것을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선 사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작년에 심은 낮달맞이꽃이 올해도 어김없이 그 청아한 자태를 뽐낸다. 전문 정원관리사가 아니고서야 얼마나 완벽하고 예쁘게 꾸미겠는가. 그저 내가 보기 좋기 위해 한다.

우리나라는 질문하지 않는 사회다. 사회는 정반합의 원리로 발전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질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질문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기자 집단에게도 질문을 던졌는데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던 사례가 있지 않는가. 오바마 대통령의 G20 서울경제회의 폐막식 때 기자회견 때 일을 말하는 것이다. 정답을 추구하는 사회. 무섭게도 이렇게 정답을 추구하게 만든 것은 권력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권위주의 사회다. 가정 내에서부터 학교, 직장, 정치권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가 없는 곳이 없다. 그런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권력 앞에 복종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교실 내 선생님의 권위는 하늘과 같다.(물론 요즘 교권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지식에 관한 권위는 여전히 가르침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학교의 존재 목적을 생각할 때 굳건하다.) 수업 시간에 질문하지 않고 주입식으로 답을 얻고, 직장에서 질문하지 않고 상사의 지시에 따른다. 사회 제도 역시 질문하지 않고 권력에 따른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질문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없다.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논쟁은 알고 보면 질문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대변에 불과하다. 질문은 사람을 사유하게 만든다. 사유하다 보면 현재의 현상이 가진 괴리에 주목한다. 결국 그 과정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기 마련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질문 '나'에 대해 질문하는 사유의 과정을 통해 인류의 발전을 이뤄왔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사유의 정체 시대다. 질문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동물적인 본능만 남아 후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왜 이런 주거 형태에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청약을 가입해서 주택청약에 당첨되고 계층 사다리로 서울에 몇 평대 아파트 보유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일 뿐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가 없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냥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판은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나? 아파트를 많이 짓는 것은 결국 거대 건설사만 배불릴뿐이다. 아파트가 살기 좋은 곳이고 부의 상징이라는 세상의 농간으로 인해 모든 시민이 아파트에 좀비처럼 생각 없이 매달릴 때 결국 배부른 것은 아파트에 마침내 입성한 시민이 아니라 그 아파트를 지은 거대 종합 건설사들이라는 것이고, 그 지역의 정치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이미 사유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이 사회에서 그 누구도 그것에 토를 달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당히 나도 편안한 합의에 이르렀는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더욱이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손쉬운 지배 도구인 두려움을 퍼뜨려 지금 집을 사지 않으면 후에 가난해질 것이라고 하는 여론을 만들어 놓은 이상 두려움에 폭주한 시민들은 아파트에 또 매달리고 매달릴 뿐이다. 전원주택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파트처럼 가격이 오르지 않아서라고 하니 이미 그들에게 집은 내 삶의 철학을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돈이 곧 철학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전원주택이 주거 형태로서 아파트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원주택은 분명히 불편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현재 우리 집처럼 단독 등기가 아닌 집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거기에 옥상 방수나 외벽 크랙 관리, 해충 방역, 수목 관리 등과 같은 것을 생각하면 보통의 사람들은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나에겐 즐거움이다. 건물 관리에 관한 다양한 지식은 중학교, 고등학교 기술, 가정 시간에 배운 지식으로도 충분하다. 조금 어려운 영역은 유튜브를 통해 충분히 배울 수 있다. 내 공간을 내가 관리하며 살기 위해 배운다는 것 자체가 진짜 배움이다. 해마다 새로운 모종을 심어 계절에 맞는 꽃을 볼 수 있는 것 역시 시간의 흐름을 그저 휴대폰 시계로만 혹은 내 신체의 노쇠해져 감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집 마당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 역시 풍요로움이다. 비싼 가스비를 줄이기 위해 난방을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지구 온난화를 직면한 지구 시민으로서 모두가 함께 동참해야 할 문제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함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없기 때문에 유행처럼 아파트를 쫓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집은 한 세대, 가정의 삶의 형태를 대변한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집이 지금은 오랜 사유의 과정에 나온 것이 아닌 그저 시대의 흐름에 어떤 권위의 농간으로 튀어나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지금의 전원주택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준다. 자연과 자신의 관계, 이웃 공동체와 나의 관계, 그 가운데 나의 사회적인 역할을 배워간다. 자신의 공간을 가지며, 그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배워가고, 공간이 어떻게 또 세상과 연결되는지 배워간다. 집을 관리하고 마당을 관리하며 진짜 지식을 배운다. 수학, 영어, 과학이 입시에 중요한 지식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모른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죽은 지식을 통해 수능을 잘 봐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오는 정수들을 맛보지 못한다면 불행할 가능성이 더 높다. 아파트에 살건, 전원주택에 살건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삶을 내가 살아내기 위해 나를 잘 알고, 사유해 보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데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공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연결한다. 그걸 깨닫기 위해서 진정한 사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곳이 아니다. 내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한국인들은 유독 전원주택을 싫어한다고 제목에 썼지만 사실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누구보다 정원을 아끼고 사랑하며, 공간을 잘 활용하여 전원주택의 형태에 오랫동안 살아온 게 한민족이다. 싫어할 리 만무하다. 정원으로 유명한 영국에서 개최하는 세계 최대의 정원박람회에서 한국의 K-정원이 우승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가 잠시 우리에게 주거 공간이 갖는 의미를 잊게 만들었다. 어찌 보면 여우의 신포도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살 수 없으니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정신 승리다. 그것이 나를 불행하지 않게 만든다는 그 선택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 진정한 용기는 내가 정말 그 포도를 먹고 싶다면 먹을 방법을 궁리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지 신포도라고 치부하고 돌아서는 데 있지 않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나의 철학을 잘 반영하고, 나의 사유를 잘 담아낸 그릇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곳이 곧 최고의 장소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그런 곳에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그것이 설령 뼈아픈 실패의 결과더라도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적어도 우리의 다음 세대는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가난을 겪었고 아파트를 통해 희망을 보고 발전을 이루었다. 피로하도록 오래 일한 전후 세대의 노고가 있기에 지금 우리는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이 질문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사유의 여유조차 갖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고 힘들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시대는 변화했다. 우리는 풍요롭고, 더욱 여유를 가질 기회가 있으며, 무엇보다 마음껏 질문하고 사유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오히려 그것이 미덕이기까지 한 사회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질문을 할 것인가.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우리의 철학을 반영한 그릇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곧 살아내는 도구다. 그렇다면 우리는 집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더욱이 아이들에게는 벽이 없어야 한다. 땅으로도 하늘로도 그 어떤 곳이라도 막힘이 없어야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자신이 곧 그릇일 수 있게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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