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풀이나나무따위를얽거나엮어서담대신에경계를지어막는물건.(네이버 국어사전) 무엇으로 엮었던 경계를 짓는 것이다. 담벼락보다는 약한 경계라고는 하지만 어찌 되었건 여긴 내 것 저긴 너 것이라고 구분 짓는 행위다. 사바나 넓은 초원에 가본일 없지만 동물들의 세계에도 울타리는 있다고 한다. 생존의 본능인 것일까. 그들 역시 소위 말하는 영역표시를 통해 각자의 세력권을 유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넓은 초원에 그런 약한 울타리는 사실상 최소한의 다툼을 방지하기 위함일 뿐이지 법적인 그 어떠한 조건도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물리적인 울타리와 명문화된 법을 통해 울타리 ; 경계를 짓는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삼다와 삼무로 유명했다. 삼다는 삼다수 덕분에 대중적이다. 삼무는 거지, 도둑, 대문을 일컫는데 제주의 진정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워낙 험난한 섬이다 보니 모두가 함께 생존해야 한다는 괸당 문화가 발달해서 십시일반 나누는 게 제주의 덕목이다. 그래서 거지가 없다. 도둑은 있어봐야 섬 밖으로 나갈 수단이 없어 도둑이 없고, 그러다 보니 대문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도둑도 더러 있다.) 그래서일까? 제주에 없던 대문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다. 정낭은 경계라기보다 주인이 어디에 갔는지 알리는 게시판 역할이었던 것이 이제는 너와 나의 경계를 구분 짓는 용도로 바뀌고 있다.
성기게 쌓아 올린 돌담은 바람길을 내놓아 적당히 막고 적당히 흘려보낸 줄 아는 지혜의 산물이다.
교회 집사님이 김밥을 싸셨다고 가져가라고 연락이 왔다. 구좌에서 주은 당근도 덤으로 주신단다. 한걸음에 달려갔는데 집사님 집 옆집에 울타리가 생겼다. 넓지도 않은 작은 마당에 울타리까지 치니 좁고 답답해 보였다. 집사님께 여쭤보니 누가 이사 오더니 울타리부터 쳤다고 한다. 제주도는 관광지다 보니 일반적인 육지에서의 주거형태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이 발달했는데 맹지인 땅을 대지로 용도 변경하여 건축 승인을 받기 위해선 결국 자본가가 넓은 땅을 사서 도로를 인입하고 하나의 필지에 여러 주택을 동시에 짓는다. 이후에는 각 주택들을 공유 지분으로 소유하게 되는데 특별법이 마련되어 한동안 도로를 기부채납 하는 방식으로 필지를 나눠 개별등기를 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이 특별법은 2020년부로 종료되었고 언제 다시 이 특별법이 시행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부동산 거래를 하면 여타 이유로 개별등기 주택이 더 비싸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개별등기를 좋아할지 모르겠다. 비싼 가격에 주택과 땅을 구매하였는데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도 불편하고, 내가 내 땅에 뭐 지으려고 주변 이웃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구조 자체가 매우 불편할 수 있다. 자기 소유의 것에 참 예민한 것. 그리고 그 너른 마당을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코로나 시대에 안위를 생각하면 더 신경 쓰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코로나의 영향이 있기 전에도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제주에 집을 지을 때면 으레 이렇게 마당을 울타리나 담벼락으로 나누곤 했다. 물론 제주 토박이들이라고 해서 땅을 나누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이 경계의 원래 목적은 타인과 내 것의 구분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사실 바람을 막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혹여나 밀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구멍 숭숭 내서 얼기설기 대충 쌓아 올렸을 뿐이다. 바람을 막지만 그렇다고 아주 막으면 무너지니 적당한 수준으로만 막아놓은 것이다. 바람길을 내놓아 약하게 만든 지혜다.
있으나 마나 한 담벼락 덕분에 아이들은 마음껏 이곳과 저곳을 오간다.
이제는 제주에 온갖 울타리들이 난무한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코로나 시국에 제주 관광 와서 코로나 퍼뜨린다고 혐오의 댓글을 다는 현지인들부터 제주로 이민 와 육지에서처럼 명확히 내 것과 네 것을 구분 짓고자 하는 울타리를 짓는 사람들까지. 좋아하는 동요 중에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자꾸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라는 가사가 있는데 요즘은 지구가 둥글지라도 울타리에 막혀 온 세상 어린이 다 만나진 못할 듯하다. 재밌는 건 울타리를 만든 건 어른인데 피해는 아이들이 보고 때로는 아이들은 그 울타리를 허문다. 전에 살던 집은 울타리가 있었다. 높지 않아 온 동네 꼬마애들은 넘어다니기도 하고 듬성 듬성한 울타리 틈새로 마음껏 넘나들었다. 그 누구도 내 마당에 오는 걸 막지 않았다. 심지어 개도 고양이도. 우리 아이들 역시 울타리 너머로 마음껏 제집 드나들듯 다녔다. 그저 제주틱한 감성의 돌무더기일 뿐 울타리는 경계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었을 때가 있었다.
심지어 지금 집은 울타리도 없다. 모든 마당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동네 꼬맹이들이 여차하면 모두가 모인다. 우리 타운하우스 단지의 사랑방 같은 맑은물어진별방방이에 다 같이 모인다. 4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행정명령을 이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경계석도 울타리도 없는 이 마당에서 테이블을 하나 두고저쪽 집 지분의 마당과 이쪽 집 지분의 마당에 앉으면 그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마당을 함께 쓰는 마당 공동체이고 식구인데. 방방이를 타지 말라고 잠가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굳게 닫힌 철문과 그 주변을 빙 둘러싼 날카로운 모양의 울타리를 보고 있자면 마음도 답답하고 여기저기가 찔리는 느낌에 아프다. 저 마당에 뛰 노는 아이들이 울타리 너머 동네 아이들이 함께 노는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동네 아이들이 저 울타리 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내 집 앞마당에 생일 잔칫상을 차렸을 뿐이고...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인 것뿐이고... 지분등기 상 내 땅은 돌길 바로 오른편까지다. 지금 남의 집을 침범(?) 한 거다
현행법상 주거침입죄는 단순히 건축물 내부로의 진입뿐 아니라 그 부속한 일정한 영역 내의 진입을 모두 포함한다. 만약 동네 꼬마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울타리 너머로 간다면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명확하게 설치된 울타리 덕분에 물리적인 경계가 확고하니 아이들의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전래동화 중에 울타리 너머 감나무에 열린 감을 따서 먹는 이웃을 보고 호통을 쳤다는 심술쟁이 할아버지 이야기가 생각난다. 코로나 시대 우리의 경계는 마스크로 충분하다. 그 역시 나와 타인의 것을 구분 짓기 위함이 아닌 서로를 지키기 위한 제3의 무엇 ; 코로나 바이러스를 향한 것이다. 그래서 마스크는 우리와 그것의 경계이지 나와 너의 경계가 아니다. 마스크 속 우리는 하나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콘크리트를 땅에 묻고 뾰족한 철 구조물을 설치하는 순간 이것은 너와 나의 경계가 된다.
어른들의 영역에서 개별등기니 지분등기니 하는 것들은 어른들의 영역에선 때로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가상의 선은 서류상으로만 남겨두고 자꾸자꾸 앞으로 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겠다는 이 순수한 자연 속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뾰족한 울타리는 설치하지 않았으면 한다. 맑은물어진별방방이는 거금 60만 원 가까이 주고 내돈내산으로 설치했다. 하지만 설치한 지 6개월 남짓 벌써 여기저기 찢어지고 해졌다. 수명이 2년이라고 했는데 2년이나 버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방방이를 이용하는데 제약을 두지 않는다. 며칠 전 새로 놀러 온 한 가정의 큰 아이가 방방이를 찢어버릴 기세로 높이 뛰어오르며 노는 것을 봤다.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 버클은 잠그고 타라고 일러주었다. 신나게 놀면 그걸로 된 거다. 너무 신나게 놀다가 찢어지면... 그저 아이가 다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서로 정한 약속과 문서로 남긴 기록만 있을 뿐 이 작은 땅 위에 생긴 작은 동네의 꼬맹이들 사이에 울타리는 없다. 서로의 영역을 마음껏 오가며 연결되고 그렇게 하나가 되어 간다.
그것은 그 부모가 아이에게 적당함을 가르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만 놀게 두는 부모더라도 최소한 그 방방이가 개인 소유의 것인지 아니면 공용의 것인지 한 번쯤 관심 가져본다면 스스로 삼가면 될 것이지 굳이 내가 울타리를 칠 필요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방방이 역시 적어도 내 소유의 지분으로 되어 있는 땅 위에 설치되어 있으니 그 아이들은 당연히 내 땅으로 들어온 것이지만 막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이웃은 개를 데리고 놀러 왔는데 우리 집 마당에 개똥을 그대로 두고 가버렸다. 마당 청소를 하며 내가 주었다. 굳이 내 마당 네 마당 할 것 없이 마당을 다니며 쓰레기를 줍곤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똥을 버릴 땐 네 마당에 버리지만 재산권을 행사할 땐 내 마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마음만 아니길 바란다.
판문점 앞에 마주한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김정은의 제안에 대통령께서 계단 한 칸보다도 높이가 낮은 콘크리트 구조물 하나를 폴짝 넘어갔다가 오셨다. 하지만 그 돌을 넘으려다 수발의 총을 맞고 죽다 살아난 오청성 씨가 있고 그보다 더 한 차별을 넘지 못해 북으로 다시 돌아간 사람도 있다. 판문점에 만약 북한 아이들과 우리나라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 돌을 넘어가서 놀고 넘어와서 놀고...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연결될 수 있고 언젠가는 나아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제주는 판문점이 아니다. 넘어가지 못할 이유조차도 없는 이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