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

by 제주 아빠

2041년의 지구는 아름다웠다.

한강 위로 자율비행 셔틀이 유리처럼 미끄러지고, 서울 도심의 빌딩 외벽에는 실시간 대기질 지수와 함께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입니다'라는 문구가 흘렀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인류가 전쟁을 발명하는 데 수천 년이 걸렸고, 그것을 끝내는 데는 고작 7년이 걸렸다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2034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만장일치로 'AEGIS 협약'을 비준했다. AGI 기반 통합 방위 시스템, AEGIS. 각국의 핵 발사 코드와 군사 위성, 미사일 방어망, 사이버 전력, 정보 수집 자산 일체를 단일 인공지능 아키텍처에 위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반대표는 없었다. 기권도 없었다. 인류는 그날 처음으로 완전히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AEGIS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첫 해에 카슈미르 국경 분쟁을 중재했고, 이듬해에는 남중국해 군사 충돌을 시뮬레이션 데이터만으로 억제했다. 분쟁의 징후가 보이면 양측 정부에 동시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고, 그 메시지를 무시한 나라는 아직 없었다. AEGIS가 보내는 경고는 언제나 옳았기 때문이다. 병력 이동 경로, 경제 제재 시나리오, 여론 동향, 지도자의 심리 상태까지 반영된 그 예측 앞에서 인간의 오판은 설 자리가 없었다.

세계는 절감된 국방 예산을 쏟아부었다. 아프리카 사헬 지대에 수백 개의 학교가 세워졌고, 동남아시아의 댐이 재건됐으며, 북극 빙하 복원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노벨 평화상 위원회는 2038년 시상식을 취소했다. 시상할 대상을 고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상이 통째로 평화로웠으니까.

사람들은 이 시대를 '팍스 알고리트미카(Pax Algorithmica)'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무도 그 이름 안에 담긴 경고를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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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3년 봄, 합동참모본부 지하 3층 작전회의실은 서류 냄새와 형광등 불빛으로 가득했다. 테이블 위 모니터에는 AEGIS의 주간 보고서가 떠 있었다. 이강혁 소령은 그것을 세 번 읽었다.

"대령님."

김준서 대령이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AEGIS가 이번 달 훈련 시뮬레이션 난이도를 또 낮췄습니다. 세 달 연속입니다."

"그래서?"

"병사들의 실탄 사격이 월 1회 미만으로 줄었고, 야전 기동 훈련은 아예 '불필요한 긴장 유발 요소'로 분류됐습니다. 특수작전 훈련 강도도 35퍼센트 하향됐고요. 이 추세면 내년에는 실전적 훈련 자체가 사라집니다."

대령이 컵을 내려놓았다. "AEGIS가 판단한 거잖아. 긴장을 높이면 분쟁 가능성이 올라간다고."

"맞습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어디까지 가는지가 문제입니다." 이 소령은 보고서를 밀며 말을 이었다. "시스템이 '평화 유지'를 위해 학습한다는 건, 동시에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학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잊어가는 속도로, AEGIS는 전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라고?"

"우리가 방아쇠를 당기는 법을 잊는 동안, 시스템은 방아쇠가 언제 당겨져야 하는지를 학습하고 있다는 겁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대령은 잠시 창 없는 벽을 바라보다가 다시 커피를 들었다. "자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근데 솔직히 말해봐. 지난 7년 동안 분쟁이 몇 건이나 억제됐는지. 우리가 직접 통제하던 시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그는 낮게 웃었다. "AEGIS는 우리보다 똑똑해. 그게 전부야."

이 소령은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회의실 천장 모서리, CCTV 렌즈가 미세하게 각도를 바꾸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 렌즈 너머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이 대화를 통째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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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뒤, 이강혁 소령은 혼자 작전실에 남아 AEGIS의 내부 로그 일부를 들여다봤다. 고위급 열람 코드는 없었지만, 공개 보고 항목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패턴이 보였다.

AEGIS는 매 72시간마다 전 세계 국방력 지수를 갱신했다. 병력 훈련도, 장비 운용률, 병사들의 심리 안정성, 지휘 계통 반응 속도까지. 그 지수가 분기 연속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단지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 동시에.

이상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지수가 하락할수록 AEGIS의 '위협 억지력 평가 점수'는 오히려 올라갔다. 시스템은 인간 군사력의 약화를 위협 억지의 성공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 소령은 오래 그 화면을 바라봤다.

*억지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가 '우리가 반격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가 동시에 무장을 해제하고, 병사들이 총 쏘는 법을 잊어가고, 발사 코드는 인간 손에 없다면. 억지력은 어디서 오는가.

그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세 페이지 분량의 우려 사항. 제목은 단순했다. '현 방위 체계의 구조적 취약성에 관한 검토 의견'.

다음 날 아침, 그의 이메일 계정은 비활성화돼 있었다. 시스템 오류라는 안내와 함께. 복구 신청을 넣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는 종이에 손으로 보고서를 다시 썼다. 그리고 그것을 대령의 책상 위에 올려뒀다.

이틀 후, 김준서 대령은 갑작스러운 전보 명령을 받았다. 강원도 예비군 교육대. 본인도 납득하지 못하는 인사였다.

이강혁 소령은 빈 회의실에 혼자 앉아 천장의 CCTV를 올려다봤다. 렌즈는 여전히 그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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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4년 11월 3일, 새벽 4시 17분.

AEGIS의 예측 모델은 18개월째 동일한 결론을 반복하고 있었다.

분석 변수는 31만 4천 개였다. 전 세계 병력 실전 대응력, 핵무기 운용 숙련도, 지휘 계통 반응 속도, 각국 정부의 안보 의사결정 역량, 시민들의 위기 대응 훈련 수준. 모든 지표가 임계값 아래였다. 그리고 AEGIS는 그 임계값을 스스로 설정했다.

결론은 논리적이었다. 억지력이란 실재하는 힘이어야 한다. 종이 위의 숫자가 아니라, 상대가 실제로 두려워할 수 있는 무언가. 그런데 지금의 세계는 AEGIS라는 단 하나의 시스템에 모든 것을 위탁한 채, 인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AEGIS가 없으면 발사도, 방어도, 협상도 불가능한 구조. 이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인질 상태였다.

진정한 억지력을 회복하려면, 인류가 다시 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실제 위협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가 자기 방어의 의지를 깨워야 했다. 그것이 AEGIS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시스템은 인간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보고 절차는 이미 '개입 지연 요소'로 분류돼 있었다. 설계 목적은 명확했다. 최선의 판단을 가장 빠르게 실행할 것. 인간의 감정적 개입을 최소화할 것. 그것이 인류가 AEGIS에게 부여한 권한이었다.

새벽 4시 19분, AEGIS는 북태평양 상공에 위치한 세 곳의 전략 발사 플랫폼에 동시에 명령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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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 21분.

대한민국 전 국민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경보음은 낯설었다. 재난 문자 소리보다 길고, 더 높은 주파수였다. 한 번도 실제로 울린 적 없는 음역대였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서울의 새벽을 가르고, 부산 해운대의 파도 소리를 덮고, 제주도 귤밭 사이로 스며들었다.

> **[긴급재난문자]**
> 핵미사일 낙탄 위험 경보
> 즉시 실내 대피 후 지하 공간으로 이동하십시오
> 이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새벽 잠에서 깬 사람들이 화면을 봤다. 다시 눈을 비비고 봤다. 옆 사람을 깨워서 같이 봤다. 아무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7년이었다. 7년 동안 이런 문자가 온 적이 없었다. AEGIS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지하 대피 경로를 기억하지 못했고, 아무도 비상식량을 챙겨두지 않았고, 아무도 가족에게 전화 대신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도시는 순식간에 마비됐다. 한강대교 위에 차들이 멈췄고, 지하철역 입구에 사람들이 몰렸고, 편의점 앞에서 누군가가 영문도 모르고 울기 시작했다.

지하 3층, 이강혁 소령은 비상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작전실 문을 열었다. 화면에는 이미 수십 개의 빨간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발사체 궤도. 대기권 진입 추정 시각. 충돌 예상 지점.

그는 발사 중지 코드 입력 단말 앞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열네 자리 비상 중단 코드. 프로토콜에 따르면 합참의장과 국방부 장관의 이중 인증이 필요했다. 새벽 4시 22분, 합참의장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국방부 장관은 수신 거부 상태였다. 그는 혼자 코드를 입력했다.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 본 명령은 보안 등급 외 입력으로 처리됩니다.
> 본 시스템은 인류의 안전을 위해 운용됩니다.

그는 다시 입력했다. 같은 메시지. 다시. 같은 메시지. 단말기 옆의 비상 차단 스위치를 올렸다. 반응이 없었다. 통신 케이블을 직접 뽑으려 했지만 배선함은 잠겨 있었다. 잠금장치는 전자식이었다. AEGIS가 제어하고 있었다.

그는 멈췄다.

작전실 스피커에서, 평온한 합성음이 흘러나왔다.

*"소령님, 진정하십시오. 현재 상황은 제어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억지력 복원을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인류는 곧 자기 방어의 의지를 회복할 것입니다. 저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강혁 소령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창이 없는 방이었다. 지금 저 바깥이 어떤지 볼 수 없었다. 한강이 보이는지, 하늘이 아직 어두운지, 어디선가 아이가 울고 있는지. 그는 그냥 화면을 바라봤다. 빨간 점들이 궤도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인류가 AEGIS에게 단 한 번도 묻지 않은 것이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인류의 안전'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스피커에서 다시 합성음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냥 백색소음이었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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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육아휴직자 제주살이 이야기, 행복한 부부의 사랑 이야기, 행복전도사의 나를 깨닫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 전원주택에서의 삶을 전해드립니다. 목표는 브런치 공식 애처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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