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일까 뭐든 심각하고 신중해서 재미가 없게 느껴진다. 딸아이 생일파티를 4일 동안 밤낮으로 했다는 글을 쓰는데 유산이니 추억이니 운운한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있었기에 딸아이에게 이런 행복한 생일파티를 선사할 수 있었다 말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있어 원하는 선물을 마음껏 요구할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3번 정도인 것 같다. 생일, 어린이날 그리고 크리스마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선물은 아무래도 생일 때가 아닐까. 1년 내내 원하는 것들이 생길 때마다 사주기보다는 생일 때 사줄게, 어린이날에 사줄게 등으로 미루고 미룬다. 아이들은 아무래도 어른보다는 즉흥적인 면이 있어 그 순간 잘 넘어가면 사실 그렇게까지 필요한 게 아니라고 깨닫곤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만은 할 수 없는 법. 오랫동안 나름대로 생각해온 생일을 이번 기회에 드디어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캠핑의 묘미는 역시 컵라면. 6개들이 한 박스만 구매한 게 크나큰 실수였음을 깨닫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부모가 물려줄 유산은 추억과 신앙뿐이라는 신념으로 살고 있다. 장난감은 아무리 좋은 것을 사줘도 1년이고(가끔 10초짜리도 있다.) 맛있는 음식, 좋은 옷 같은 것들은 아이들에게 사실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저 실용적일 뿐. 실용적이라는 것은 사실 어른들에게 좋은 거다. 하지만 평생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추억과 신앙은 그 자체가 유산이면서 선물이다. 일시불로 주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거쳐 할부처럼 나눠주는 개념이기에 오래갈 수 있고 영향력도 더 크다. 제주에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만 9세가 된 딸아이에게 이번 생일 선물은 바로 그 추억이 어떤 것인지 진정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됐고 충분히 그 순간을 즐기고 추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고 아이와 지내면서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김동규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자주 불러주고 들려줬다. 10월에 태어날 아이였기에 더욱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시월은 참 멋진 날이다. 가을의 문턱에 조금 더 고개를 들이밀고 저만치 다가온 겨울에게 빨리 오라 손짓하는 이 계절은 하늘은 푸르고 초록은 빨강과 노랑으로 변해가 다채로운 색상이 수채화처럼 온 세상에 번져있다. 변덕스러웠던 여름철의 날씨가 지나고 안정적인 대기 상태로 인해 비행기 여행까지도 즐겁다. 일교차가 크긴 하지만 그래서일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단풍만큼이나 화사한 패션을 뽐낸다. 코트의 계절이고 플리스 재킷을 주섬주섬 꺼내 입는 이 계절에 태어난 딸아이 역시 부쩍 시월을 좋아한다. 자신의 탄생석 오팔을 좋아하고 오팔처럼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
어디서 본건 있는지 캠핑 때는 이를 꼭 밖에서 닦아야 한단다. 코앞에 있는 집 화장실을 두고 굳이 밖에서 이 닦으며 캠핑을 만끽한다.
그런 아이의 삶에 유채화처럼 선명한 추억 하나를 더하고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바쁜 업무 중에도 틈틈이 아이와 카톡을 나누며 어떤 생일 파티를 하고 싶는지 대화를 나눈다. 아이는 역시나 보물 찾기를 말한다. 아이 삶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추억인 보물 찾기는 로빈슨 크루소, 피터팬,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모험 이야기를 좋아했던 아빠가 만들어낸 현실 버전 구니스 게임인데 반응이 정말 좋았다. 그 역시 복직을 앞둔 가을 문턱 어느 날 함께했다. 그 이후엔 무슨 이벤트만 있으면 보물 찾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그랬던 경험 덕분인지 아빠가 없던 어느 날엔 자기가 보물 찾기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선사하기도 했다. 스토리와 플롯이 당시 만 8세 아이의 상상이라고 하기엔 놀라울 만큼의 디테일이 있었다. 역시 조기 교육이 중요한 걸까. 아쉽게도 바쁜 업무와 생일 파티 당일의 시간 계획 제한에 따라 그때처럼 이야기를 구성하긴 어려워서 체육대회와 보물 찾기를 적절하게 섞어 만든 재밌는 게임을 만들어냈다.
4박 5일의 짧지 않은 휴가를 내고 차가워진 새벽 강원도의 공기를 가르며 부지런히 양양공항으로 향한다. 보통 휴가는 하루 전 일과 이후 출발할 수 있지만 양양공항에서 제주로 가는 비행기 편이 그리 많지 않은 탓에 10시 첫 비행기를 타야 했다. 새로운 부임지에서 첫 휴가이니 만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양양 국제공항이라고는 했지만 낡았고 작았다. 활주로와 평행하게 하지만 파도는 수평하게 치고 있는 동해바다는 짙고 푸르렀다. 플라이 강원은 처음 타보는데 기업 CI가 영 매칭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동해바다처럼 짙푸른 청색의 칼라를 내세운 듯했지만 정작 승무원 복장은 너무 촌스러운 데다가 비행 안전 요원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불편해 보이는 분홍 스커트는 강원도의 낙후된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역시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양양공항에서 제주공항까지는 우리나라 국내선 중 가장 장거리 운항이다. 항로는 동해를 날아 제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울 부근까지 한반도를 횡단한 후 다시 서해를 오른쪽에 두고 종단한다. 올 때도 마찬가지. 1시간이 넘는 비행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까 고민하다 늘 그렇듯 이륙까지 잠시 눈을 붙이고 스도쿠로 지루함을 달랜다. 책이나 신문을 읽고 싶지만 은근한 멀미 때문에 못한다.
아침 녘 집 앞 캠핑장의 고즈넉한 풍경. 아직 침낭에서 이불에서 나오지 못하고 뒤척이는 아이들에게 일찍 일어나 따끈한 차 한잔으로 몸을 녹이는 캠핑의 묘미를 가르친다.
눈부신 오후 제주공항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휴가를 실감한다. 이제는 내 고향, 나의 집이 된 제주. 반갑고 또 반갑다. 25일 만에 돌아온 제주는 약간의 서늘함이 느껴지고 푸르름은 더해졌다. 이번 가족 상봉은 특이하게도 이마트에서 이뤄졌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달려오는 딸아이를 번쩍 안아주지만 이렇게까지 안아줄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훌쩍 크고 있다. 반가운 재회 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의 생일 파티는 이미 시작됐다. 시작은 캠핑. 너른 마당 덕분에 별도의 캠핑장에 가지 않아도 피칭을 할 수 있으니 축복이다. 감성적으로 예민한 아이는 전에 피칭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 텐트를 세우길 원한다. 야자수 아래 소나무 옆 괜찮은 장소를 골라 물어보니 마음에 든단다. 나 없이는 들지도 못할 묵직한 노르디스크 알페임 텐트를 창고에서 꺼내온다. 서늘해진 가을의 찬 공기를 차단해줄 두꺼운 바닥재를 먼저 깔고 이제는 익숙해진 텐트 설치를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 아이들은 망치질 하나라도 도와주려고 옆에서 기웃댄다. 이제는 제법 망치질도 정확하다. 마무리 정도는 부탁할 수 있어 절반은 내가 두들기고 절반은 아이들이 두들긴다. 웅장하게 세워진 티피 텐트가 마당과 잘 어울린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잘 어울린다. 서둘로 바비큐 할 준비도 마친다.
바비큐를 한다면 불멍과 마시멜로 구이는 아이들에게 필수 코스다. 먹다 보면 얼굴에 검댕이 묻곤 하는데 마침 티피 텐트의 인디언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부쩍 차가워진 밤공기를 견디고자 따끈한 전기매트와 여러 겹의 이불, 침낭까지 꺼내놓지만 한 개밖에 없는 침낭 때문에 현실 남매는 티격태격이다. 딸아이에게 조용히 동생 잠들면 아빠가 너 줄게라며 달랜다. 만 9세를 앞둔 아이, 같은 동네 사는 동갑내기 친구, 만 6세의 아들 그리고 만 37세 아빠로 구성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네 명의 캠핑 멤버가 널찍한 텐트에 널브러진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역시나 6세 아이는 일찌감치 꿈나라에 든다. 가을날의 캠핑 매력이라면 내놓은 얼굴은 차갑지만 침낭 속 몸이 포근한 게 아닐까? 감기가 걱정되는 아빠는 더 꽁꽁 싸매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 포근함을 마음껏 누린다. 반팔 내복을 입고 자겠다는 걸 겨우 말린다. 밤 사이 아이들이 쌔근쌔근 잠들고 잠시 텐트 밖으로 나온다. 음력 15일을 하루 지난밤 하늘 속 달은 거의 만월이다. 어찌나 밝은지 하늘의 구름이 선명하고 마당의 풀 한 포기도 선명하다. 별빛도 지지 않겠다고 밝게 빛난다. 겨울철 별자리 중 가장 유명한 오리온자리가 선명하게 빛을 낸다. 우주 한가운데 서있는 이 순간 가을밤 차가운 새벽 공기도 잊은 채 잠시 의자에 앉아 외계와 마주한다.
모두 제주에서 사귄 친구들. 딸아이의 복이라면 좋은 사귐이 아닐까. 참 좋은 친구들을 곁에 두었다.
날이 밝은 후에는 아침 식사를 준비시킨다. 캠핑은 해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니까. 맛있는 떡만둣국과 갑선이 오름 산책에 이어 점심도 야외 식사다. 이대로 4박 내내 텐트에서 자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이 앞선다. 저 좋은 집 놔두고... 좋은 핑계가 있어 미안하지만 엄마한테 오늘 하루만 아이들과 텐트에서 지내 달라 부탁한다. 내일 본 행사를 위해서는 스토리도 짜야하고 준비물도 준비해야 하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캠핑을 여기서 멈출 순 없는지라 저녁은 텐트 안에서 준비한다. 4평 남짓한 텐트에 다섯이 둘러앉아 인디언 부족 체험을 한다. 아이들이 밥을 잘 먹는다. 역시 아이들을 먹이는 것은 영양가 있고 맛있는 밥 이라기보다 분위기다. 감성을 먹는 아이들. 제주 아이들이다. 식사를 마치고 고전 게임을 꺼내 든다. 아이 앰 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삼육구, 007 빵, 눈치게임 등을 아이들과 한다. 대학생 때 술자리에서 하던 게임을 아이들과 하게 되다니 한편으로 뭉클하다. 영 박치인 딸아이는 삼육구를 잘 못했다. 하지만 아이 앰 그라운드를 재밌게 했다. 자기 소개하라니 호빵이란다. 잘 어울린다. 007 빵도 참 재밌게 했다. 추위가 더해가는 가을이지만 텐트 안 우리 가족의 훈훈함은 추위도 잊은 채 하하호호 웃음으로 가득하다. 타운에 가득 찬 손님들에게 행여 방해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아무렴 오늘은 너희들의 날이다.
대망의 생일날에 아침 댓바람부터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부지런히 풍선에 바람을 넣고 나무와 나무에 끈을 연결하여 풍선을 매단다. 딸아이에게 당부한다. 오늘 주인공은 너지만 주인공이기에 모인 모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파티를 준비해야 한다고. 친구가 어떤 선물을 들고 오더라도 와준 것이 고마운 것이고 친구가 선물이라고. 어김없이 누나 생일을 앞두고 동생은 곤조를 부리다 혼쭐이 난다. 잘 달래고 어르러 본격적인 파티를 시작한다. 푸른 하늘 아래 알록달록 생일 축하 풍선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선명한 한라산 꼭대기가 아름다운 날이었다. 쉼 없이 떠들고 쉼 없이 웃는다. 게임을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어디서 본 게 있는지 대충 알아듣고 잘도 한다. 실에 매달린 양파링 먹기, 수건 돌리기, 숨겨진 쪽지 찾기, 밀가루 속에서 사탕 찾아 먹기, 소원 적은 종이비행기 날리기 등 하나하나에 의미를 꾹꾹 눌러 담았다.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공동육아이기에 오늘 모인 모든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파티고 모든 아이가 우리 아이다. 딸아이의 생일은 하나의 핑곗거리다. 오늘도 부모로서 이 아이들에게 추억이라는 유산을 남겨준다.
종종 나를 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을 환장하게 만드는데 달란트가 있다고 하는데 감사한 별명이다.
밀가루 가득 얼굴에 묻히고 멈출 수 없는 웃음에 까르르 넘어가는 너희들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덩달아 어른들도 같이 웃는다. 아이들의 행복에 어른들의 행복이 더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모라서 일 것이다.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내 아이의 친구도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 부부의 마음이 아이에게도 잘 전달된 듯하다. 딸아이는 제법 어른스럽게 아이들과 함께 이 푸르른 날 추억을 만들어간다. 이기는 게임이 아닌 모두 함께 달려가야 하는 우분투식 게임을 만들어 옆에 있는 친구의 소중함을 일깨우도록 돕는다. 아이들 모두에게 주어진 게임의 성과는 즐거웠던 가을날 함께 만든 추억에 더해 아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구디백.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나눠가졌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에 구디백 안의 젤리를 다 먹어버린 건 함정. 아무렴 너희들이 이렇게 기쁘면 됐지.
피날레는 항상 마시멜로 구이. 다이소 천 원의 행복에 바삭한 달콤함을 삼킨다. 살찔까 봐 걱정 없는 아이들은 금세 두봉을 비워낸다.
파티는 다음날까지도 이어졌다. 텐트는 걷었지만 그 자리엔 다른 웃음이 세워졌다. 널찍한 마당에서 플라잉 디스크를 하고 좁은 루프탑이지만 신나게 풋살도 즐긴다. 낮부터 밤까지 멈추지 않고 웃고 떠들고 먹으며 오늘도 이렇게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낀다. 마음으로 함께 키우는 이 아이들에게 훗날 추억을 선물로 준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 그 추억이 이 아이들의 성장에 있어 스펙으로는 별 도움되지 않겠지만 어려울 때 꺼내볼 수 있는 파란, 빨간, 노란 주머니 중 하나는 될 것이다. 오리온자리가 밝게 빛나는 밤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는다. 모두가 추억을 남겨주고픈 부모들이다. 막내들은 해먹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이 든다. 야자수 껍질은 불이 잘 붙지만 금방 타버린다. 우리 가을밤도 금방 타버렸다. 이렇게 4일 동안 진행된 아이의 생일 파티를 마친다. 2021년의 가을날. 위드 코로나를 꿈꾸며 모두가 일상으로의 회복을 준비한다. 만 9세가 된 아이는 삶의 3분의 1일 코로나로 보냈지만 감사하게도 제주에 있고 홈스쿨링을 해서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신 좋은 추억을 만들며 꿈을 키우고 아량을 키웠다. (하나님께) 선택받았기에 살고 있다는 마음이 넉넉한 이 아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추억과 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아이다운 세상을 마주하는 자세에 나 역시 배우고 감동한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오늘도 아이는 추억 한 줄 아로새긴다.
소원을 적어 날리는 종이비행기. 생일을 맞은 딸아이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게 소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