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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속의 희망

대다수의 거짓

by 제주 아빠

* 사진 출처 : Unsplash, Michael Carruth, Truth


* 이 글은 일부 콘텐츠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기생충, 스위트홈, 오징어 게임, 지옥, D.P)


download.jpg 영화 '기생충' 포스터


한국 사회의 이슈를 예술적으로 승화하고 전 세계적 공감을 얻어 인기를 끌고 있는 디스토피아적 작품 네 편이 화제다. 디스토피아 시리즈는 '기생충'으로 시작된다. 이후 스위트홈, 오징어 게임, 지옥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디스토피아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PTSD를 불러온 D.P도 있다.) 그 외에도 좀비물로 꽤나 인기를 끌었던 부산행, 서울역, 반도, 킹덤 역시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각함으로써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묘사한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진 드라마가 하나같이 인기를 끄는 것은 이 세상의 현실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동시에 매우 은유적으로 잘 담아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현실은 드라마 속 세계보다도 더 비극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게 인간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리라.


그런데 나는 생각이 많이 다르다. 일단 흥행했다고 모두가 동의한다는 뜻은 분명 아닐 것이란 것이다. 얼마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친구가 계속 '대다수'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길래 대다수라는 표현에 반대한다고 한 적이 있다. 그 '대다수'가 서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대한민국 5천180만 인구의 1/5 수준에 불과한 서울 사람들을 '대다수'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대다수가 얼마나 큰 오류가 있는지에 대해 반문해볼 수 있다. TV에 많이 노출된다고 해서, 흥행한다고 해서, 다운로드 수가 많다고 해서 무엇보다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대다수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꽤나 무리가 있다. 더해서 그 대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소수의 저항하는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공통점이다. 대다수가 항상 옳다면 세상은 소수의 기행으로 변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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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서 과외 선생과 정분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한심한 딸이 나오는데 오히려 이렇게 어리석어 보이지만 낭만적인 사랑만 추구하는 딸 덕분에 기우(최우식 분)가 살아난다. 수많은 탐욕과 죽음 속에 어찌 보면 유일하게 사람을 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D.P에서도 주인공인 안준호 이병(정해인 분) 역시 그 어떠한 다수의 폭력(선임병들의 폭력, 간부들의 폭력 등)에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그마한 변화들을 이끌어 낸다. 스위트홈에서의 차현수(송강 분)가 그랬고, 오징어 게임에서의 성기훈(이정재 분), 지옥에서의 민혜진(김현주 분) 모두 마찬가지다. 대다수가 세상에 무릎 꿇고 탐욕을 뿌리치지 못하지만 정말 아주 극소수의 다름이 결국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에 집중하기보다 디스토피아 자체에 집중한다. 이슈들 역시 그들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에 집중되기보다는 비극 자체에 집중된다.(이 부분은 대다수라고 할만하다. 이미 흥행이라고 하는 작은 이벤트에서 그 이유, 그런 평가가 대다수다. 전체가 아닌 흥행이라고 하는 작은 영역의 대다수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대다수라고 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큰 모순이다. 애초에 대다수라고 하는 것은 공통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하는 것은 나머지의 조각난 각자의 생각들을 하나로 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오히려 그 조각들이 더 대다수에 가깝지 않을까? 가령 '지옥'에서 너무나도 명확한 지옥으로 가는 시연이 있는 세상 속에서도 특정 종교집단에 순응한 사람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시연 자체를 보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동의한 절반 역시 절반일 뿐이데 다양한 의견으로 조각난 나머지 절반은 응집되지 않았단 이유로 동의한 절반만이 대다수라고 말할 수 없다. 순응한 집단 하나보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조각들이 오히려 생각의 숫자로 치면 대다수다. 1개의 생각 대 다양한 다른 생각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소수 의견을 묵살하곤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 거짓 대다수는 힘을 얻는 것일까?


202010212329172019.jpg 주요 뉴스 매체라고 하는 YTN이 보여주는 대한민국이 과연 진짜 대한민국일까? 게다가 이런 뉴스 매체의 배경화면도 거의 항상 서울이다. 대한민국은 서울 뿐인가.


사무실에서나 집에서 보는 매체라고는 YTN이 전부다. 크게 3가지 이슈가 반복해서 나온다. 코로나, 부동산, 대선. 하지만 이 세 가지와 관련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다. 부동산 이슈를 아무리 말해도 많게 잡아야 서울과 수도권(경기도)에 살고 있는 인구 약 2,300만 수준이고 대한민국의 절반도 안된다. 주요 광역시, 도 등에 살면서 집 걱정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어찌 보면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은 자가를 보유하고 잘 살고 있다.(2020년의 자가보유율 60.6%다.) 이 사람들의 대다수가 또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하고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집에 산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다.(다만, 이제 새롭게 어른이 되어 삶을 시작하는 청년의 자가보유율이 60대 이상의 절반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고, 그들이 자가를 보유하기까지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청년이 다 '서울'에 집을 사고 싶어 해서 앞으로의 터무니없이 비싼 서울의 집값 때문에 앞으로의 자가보유율이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오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대다수의 거짓을 덮으려고 끊임없이 그 대다수라고 하는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내야만 스스로가 안심돼서 아닐까?


코로나 역시 마찬가지다. 2021년 11월 19일 기준 확진자는 412,311명이다. 이는 우리나라 인구(5천182만 1,669명)의 0.796%에 불과하다. 물론 영향을 받는 인구는 100%겠지만 오히려 대다수는 방역수칙을 잘 지키며 안전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감염되지 않은 99%에 비해 감염된 0.796%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내용을 방송의 30% 이상 할애하다 보니 무엇이 대다수인지 혼란을 겪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팩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언론의 속성이고 우리는 매번 대다수의 거짓에 속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를 적나라하게 꼬집었던 팩트풀니스라는 책이 한 때 유명세를 탄바 있지만 결국엔 우리는 수치를 믿기보다는 언론에 노출되는 현상에 집중하곤 한다.


download (1).jpg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존재하는 척 진정한 존재인 인간을 이용해 먹는 리바이어던


현실이 이러다 보니 목소리를 내는데 고민이 되곤 한다. 드라마 속에서도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통받고 저항에 부딪힌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알고 보면 목소리 내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속고 있는 거짓 대다수에 비해 안 속고 잘 사는 진짜 대다수가 사실 더 많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소수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맞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대다수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한류가 온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BTS가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로 인기를 끌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한류를 접할 수 있고, BTS의 'My Universe'를 들으며 감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여전히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가 10억 명에 달하며, 10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가 전체 인류의 절반 이상인 게 현실이다.(출처는 Gapminder지만 2011년도 자료이며, 2021년 자료 중에는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약 9.2%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저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여유롭게 스마트폰을 들고 데이터 요금을 마음껏 지불하며 K-드라마와 K-pop을 즐기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리 내는 거짓 다수가 가진 힘은 소리 내지 않는 진짜 다수 중 극히 일부와, 힘없는 소수에게 폭력이다. 마치 '지옥' 마지막에 나오는 택시 기사의 말처럼, 자신의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끌고자 하는 사람에게 까지 거칠게 행동하는 화살촉 집단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그런 폭력은 반대로 또 그저 선량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대다수가 저지르기도 한다. 침묵하는 다수의 횡포다. 결국 목소리를 내는데 고민이 되지만 침묵하는 다수가 되지 않으려는 나의 정의감 때문에 이런 글을 또 남기고 만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도 부려야 잘 사는 대다수의 행복한 사람들 중 일부가 피해 보는 일이 안 생기지 않을까. 잘 사는 대다수의 행복한 사람들 중의 일부가 거짓 다수의 불행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 그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거짓 다수의 분노가 세상을 지배하게 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정의로운 대다수가 정의를 외쳐야만 한다.


611211110015738637_1 (1).jpg '멈춰' 외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은 사실 '멈춰'를 외치는 사람들이 등장할까 봐 두려워서 소문을 퍼뜨리는 것뿐이다.


얼마 전 학교폭력을 방지하자며 만들어낸 '멈춰' 동영상이 냉소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적 있다. 7년 전 학교폭력 방지 프로그램으로 도입되었던 이 캠페인은 당시에 진짜로 학교폭력 건수를 줄였다는 통계가 있었지만 7년이 지난 오늘날 현실 세계에서 학교 폭력이 만연하자 비웃듯이 이런 밈을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기를 끈 이 '멈춰' 패러디 동영상에 우리는 속으면 안 된다. 하나의 밈으로 냉소적인 이 거짓 다수의 패러디는 침묵하는 다수를 만들어내려는 그들의 속셈에 불과하다. 정말로 '멈춰'를 외치는 것은 그들을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들은 여론이라는 수단을 아주 잘 이용하는 21세기의 괴벨스들이다. 진짜 대다수는 정의감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세상은 진즉 무너졌어야 한다. 기생충에서도 결국 언론에 노출되는 그런 사건은 자극적이지만 소수의 사례에 불과하고 여전히 대다수는 가족과 함께 따스하게 살아간다. 스위트홈에서도 세상이 망한 것 같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계속 연결되고 있다.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 456명보다 더 많은 다수는 잘 살아가고 있다. 지옥에 시연된 사람들, 새진리회에 무릎 꿇은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꿈꾸며 살아가고, 희망 속에 작은 저항을 이끌어 낸다.


photo-1520854026701-ec9e25ccd507.jpg Don't be afraid! 쫄지마! 외쳐! 드루와! (출처 : Unsplash, Jon Tyson)


언론에 노출되는 작은 창을 보고 세상 전부를 보지 말자고 외쳐본다. 그리고 그런 거에 속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 거짓 다수를 만들어내며 세상을 마음껏 주무르려는 사람들에게 기죽지 말자고 외쳐본다. 학교 폭력을 저지르며 마치 세상을 주름잡는 것처럼 보이는 청소년은 사회에 나가는 순간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게 될 것이며, 자신의 탐욕 때문이면서 이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며 저항하자고 혹세무민 하는 사람들은 평생 불행하게 살게 될 것이다. 계급이라는 권력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군대 내 소수의 권력자 인척 하는 범죄자 집단들 역시 마찬가지다. 반드시 정의는 승리한다. 디스토피아 속의 희망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다수다. 그 사람들은 거짓 다수에게 외쳐야 한다.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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