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울지 않는 밤], 김이설
_명절이면 시아버지의 남자 형제들 가족이 시댁에 모여 차례를 지낸다. 보통 이십 명 정도다. 나는 전날 아침에 간다. 전을 부치고 시어머니가 음식하시는 걸 도와드리고 끼니마다 나온 설거지를 한다. 명절 당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제기를 닦고 준비한 음식을 담고 차례상으로 옮긴다. 시아버지는 차례상 교통정리를 하신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같은 관습인지 뭔지에 따라 음식의 위치를 정하는 거다. 차례상 상단 가운데에 (내가 결혼하기 한참 전에 돌아가셨다는) 시조부모님의 얼굴이 담긴 액자 두 개와 지방문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다양한 음식들이 놓인다. 기본 차림은 밥과 국, 갈비와 산적, 생선찜과 생선구이, 각종 전과 삼색 나물, 밤, 대추, 곶감, 떡, 말린 황태, 각종 과일, 식혜, 제주. 올해로 결혼 15년 차. 매해 한 번도 빠짐없이 명절과 제사를 지냈는데 여기에서 음식이 추가되면 추가되었지, 줄어든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음식은 다양한 성씨를 가진 며느리들이 준비하지만 정작 차례는 남편의 성씨(김씨)를 가진 사람들이 지낸다. 차례가 끝나면 교자상 네 개가 펼쳐진다. 상 하나에 다섯 명씩 앉는다. 며느리들이 좁은 부엌에서 일사불란하게 음식을 네 개의 그릇에 나눠 담는다. 갈비, 산적, 생선, 전, 나물, 아무튼 모든 것을 네 접시로 나눈다. 차례상에 올리지 않았지만 시어머니가 따로 준비한 게장도, 김치도 종류마다 네 접시씩 담고, 밥과 국그릇을 하나씩 올리면 상 위는 컵 하나 놓을 자리도 없다.
베란다 쪽 상, 그러니까 상석에는 시아버지를 비롯한 남자 어른들이 앉고 그 아래로 김씨 성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앉고 부엌 쪽 상에는 며느리들이 앉는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날 태세로. 상석에서 이런 요구가 나와서다. 국이 부족하다, 전 찍어 먹을 간장이 없다, 밥 좀 더 달라, 김치 더 없나. 그럼 나이가 마흔셋이어도 며느리 중 막내인 내가 밥숟갈 뜨다 말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먹고 일어나면 그릇을 회수해 개수대로 가져간다. 한번에 회수되진 않는다. 술과 담소를 곁들여 천천히 식사를 하는 상석은 아직도 식사가 진행 중이다. 일단 회수된 그릇 설거지를 시작한다. 며느리 두 명이 거품질과 헹굼질을 나눠 하고 있으면 다른 며느리들이 상과 부엌을 오가며 그릇을 운반한다. 파트너와 업무는 매번 다르지만 내가 설거지 담당이 아니었던 적은 임신했을 때밖에 없다. 식기 건조대가 그 많은 그릇을 수용할 리 없다. 누군가 개수대 아래 마른 수건 몇 개를 펼 친 다음 그 위에 큰 소쿠리 두 개를 놓는다. 그럼 헹굼질 담당이 말끔히 씻긴 그릇을 소쿠리에 놓는다. 식기 건조대와 큰 소쿠리 위로 수북하고도 위태롭게 그릇이 쌓일 때쯤이면 발바닥에선 불이 나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다. 식탁에선 과일 담당 며느리가 각종 과일을 깎아 그릇에 소담하게 담고 있다. 예쁘게 깎인 과일은 거실에 있는 김씨들에게 전달되고 며느리들은 좁은 식탁에 모여 앉아 살점이 얼마 남지 않은 과일 꼬다리(?)를 먹으며 수다를 떤다. 그런 다음 음식 나눠 주기를 좋아하시는 시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남은 음식을 위생비닐이나 반찬통에 나눠 담아 챙긴다. 여기까지 하면 명절날 며느리들의 일이 마무리된다.
_내게는 시사촌형님 두 분이 있다. 두 가족 모두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편인데 재테크에 밝은 큰형님이 그즈음에 집을 마련했고 살림이 폈다는 소식을 시어머니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구정이었나, 추석이었나. 아무튼 명절날이었다. 재테크는 모르겠지만 손재주 좋은 작은형님이 소담하게 과일을 깎고 나머지 며느리들이 식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큰형님에게 말씀하셨다.
넌 어쩜 그리 재주가 좋으니. 첫째는 마누라 잘 만나서 집도 사고 좋겠네.
작은어머님도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셨다. 나는 사과를 깎던 작은형님의 손이 아주 잠깐 멈춘 것을 보았고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애쓰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시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마누라를 잘 만났다고 생각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자 어쩐지 기분이 더욱 언짢아졌다.
집에 돌아갈 때가 되자 작은형님은 직접 만들어 포장해 온 아크릴수세미 몇 개를 나눠주었다. 너무 예뻐서 이걸로 어떻게 설거지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시어머니와 작은어머님, 큰형님과 나에게 주려고 실을 고르고 뜨개질을 했을 작은형님은 그럼, 남편을 잘 만난 걸까. 대체 결혼이란 뭘까. 아무튼 그날 좁은 식탁을 감쌌던 미묘한 분위기는 아직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_수록된 소설 모두가 인상적이고 좋았지만 특히 <축문>을 읽으면서 이 기억이 떠올랐다. 공감해 대리만족을 느끼면서도 씁쓸했다.
여성의 삶과 결혼, 상실과 결핍, 가족과 불행의 대물림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말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섣불리 희망할 수도 섣불리 포기할 수도 없는 삶이 계속될 뿐이라고. 어쩌면 그것이 삶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