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케이크의 맛], 김혜진
_김혜진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많이 참는다. 여기서 '참는' 대상은 주로 감정이나 충동으로, 소설에서는 대개 말을 참는 것으로 표현된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뱉지 않는 것이다. 꼭 하고야 말리라 다짐했던 말들은 결국 그대로 삼켜지고 만다.
그러면 끝내 발화되지 못한 그 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휘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다. 남아 있다. '참는' 인물에게 머무르는 것이다. 언제까지, 얼마나 머무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건 말을 '참음'으로써 인물을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인물의 생각과 감정이 변하고, 그가 맺은 관계가 변하고, 그의 처지나 형편이 변한다. 그 변화란 미세해서 세심히 살펴봐야 알아챌 수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극적이거나 드라마틱한 결말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다고 소설이 뻔하거나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려고, 인물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저절로 촉각이 곤두세워진다. 이야기에 빨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짚고 넘어가야할 게 남았다. 인물은 왜 참는가. 그러니까 인물이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고스란히 삼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신을 위해서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처지를 배려해서인듯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위해서다. 어쩌면 그건 자괴감이나 수치심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말을 함으로써 악화될 상황이 불편하고 두렵다. 말이 가닿는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부끄러운 내면이 비춰보인다.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들고 상대방을 볼 낯이 없기에 참는 것이다. 그런 인물에 이입해 감정의 흐름에 스며든 독자는 때로 얼어붙는 듯 멈칫하고 때로 책을 내려놓고 숨을 고른다. 그에게서 내가,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참았으므로,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무언가를 깨닫고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 '무언가'가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_"그런데 모른다고 하면 모르는 게 되나?
내 입에서 불쑥 그런 말이 새어 나온다."(p.64)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연 안에서도 꺼내지 않았던 수많은 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런 말들이란 기다리면 어느새 또 저절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였다."(p.128)
"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킬 수 있었던 것,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잃지 않았던 모든 것. 케이크의 맛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응축시켜놓은 것처럼 아주 진하고 깊다."(p.158)
_몇 년 전 [너라는 생활]을 읽고 이런 감상을 남긴 적이 있다.
"얼마나 꼼꼼히, 얼마나 세심히, 얼마나 오래 살펴보았을까. 김혜진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러면 이런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집을 수 있는 핀셋이 있다면, 그것을 쥐고 마음의 결을 한 올씩 조심스레 들어올려, 얕은 숨마저 죽인 채, 그것의 가장 깊숙하고 내밀한 면까지 살뜰하게 들여다보는, 차분하고 예리하지만 다정한 눈빛의 안경 쓴 작가의 모습이."
최근 [너라는 생활]을 다시 읽었다. 서너 번 반복해 읽으면서 탄복을 거듭했는데 이번 짧은 소설집 역시 그러했다. 이야기는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그 묵직함에 끌려 연달아 한 번 더 읽었다. 그러고 나니 이번에도 눈에 선했다. 아주 예리한 핀셋을 들고 사람 마음의 결을 한 올 한 올 신중히 들어올려 관찰하는 애틋한 눈빛의 안경 쓴 작가의 얼굴이 반갑게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