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다가설 수 없는" "일할 자격"에 대하여

[일할 자격], 희정

_40대. 주부. 이 두 단어를 쓴 뒤 또 무엇을 덧붙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밖에 없었다. 일단 '40대 주부'라는 것을 밝히고 나면 세상은 나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는다. 이름이 무엇인지, 주부가 되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무엇을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40대 주부라는 것 외에 설명할 말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어떤 시절이 이었다. 아이를 등원시킨 후 거칠게 차선을 변경해가며 회사에 도착해 주차하자마자 달려가면 8시 50분에 컴퓨터를 켤 수 있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은 뒤 카페에 간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기다리면서 카페를 둘러본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운데 눈에 띄는 이들이 있다. 테이블 옆에 유모차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젊은 엄마들, 한눈에도 꾸준히 관리해온 티가 나는 또래의 여성들. 그들을 힐끗거리며 나와 여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춰 이런 이야기를 한다. 부럽다. 저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일하기 싫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명치께에서 달랑거리는 공무원증이 잘 보이도록 그들을 향해 은근히 몸을 돌린다. 보고서를 만들어 결재를 받고, 전화를 걸고 전화를 받고, 출장을 다녀와 다시 보고서를 만들어 결재를 받다 보면 어느덧 6시다. 퇴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린이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당장 사무실을 나서고 싶지만 나는 괜히 서류를 들추고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가방은 이미 다 챙겨놓은 상태. 6시 30분쯤 과장이 나간다. 저녁 먹고 들어온다고. 퇴근할 사람은 어서 퇴근하라고 말하면서. '퇴근할 사람'인 나는 과장에게 인사를 하며 얼굴 도장을 찍는다. 과장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쯤이면 부리나케 컴퓨터를 끈 뒤 가방을 들고 나간다. 어린이집에 들렀다 집에 오면 다시 시작. 먹이고 먹고, 씻기고 씻고, 재우고 자는 일이 남아 있다. 점심에 카페에서 봤던 여자들을 떠올린다. 부럽다. 그런데 사실은 부럽지 않다. 더 솔직하게는 '명치께에서 달랑거리는 공무원증이 잘 보이도록 그들을 향해 은근히 몸을 돌리'는 '나'가 진짜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도 있었다. "정상성" 혹은 "주류"의 범주에 속해 소위 '번듯한' 직장에 소속되어 경제활동을 하며 내 "몫"을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이른바 "일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생각해본 적도 없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_인생의 굴곡을 거쳐 '40대 주부'가 된 나는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나는 어떠했는가. 퇴근시간이 넘어도 눈치를 보느라 퇴근하지 못하면서 "신입사원이 요구받는" "적응"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후배를 어떤 시선으로 보았는지. "덮어놓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비혼모”의 모성을 어떤 식으로 의심하고 폄하했는지. (몇 년 뒤 내가 우울증을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우울증 환자임을 밝히고 당당히 병가를 내던 동료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 역시 "나이 듦"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임에도 "궂은일"하는 노인을 어떻게 여겼는지. "궂은일밖에 안 내주면서 궂은일 한다며 불쌍히 여"기진 않았는지. 종종 마주치는 "뚱뚱"한 이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자기 관리를 못한 그들의 잘못이라는 편견으로 그들을 은근히 탓하면서 사회가 규정한 "정상 규격 틀"에 어떤 "편견과 낙인이 들어가" 있는지 따져볼 생각은 왜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현재의 나를 본다. 집안일도 어엿한 노동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종종 직업난에 '주부'라고 적어야 할 때면 어쩐지 위축되고, 말끔히 떨쳐 내지 못한 어떤 찜찜함에 아이가 등교한 오전이면 마치 출근하듯 책상에 앉아 뭐라도 읽고 쓰려고 애쓰는, '40대 주부'인 나는 "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일할 자격"은 무엇인가. "모두 일해야 한다지만 아무나 일할 수 없는 사회, 다가설 수 없는 노동의 자격"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_희정 작가의 글에는 힘이 있다, 라고 써놓고 '힘'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수식어를 고민했다. 몇 번을 반복해 읽고 곱씹고 행간을 서성이게 했던 그의 책들과 이를 통해 마음으로 공감하고자 애썼던 많은 삶들을 헤아리며 다양한 수식어를 썼다가 지웠다. 결국 이렇게 쓰기로 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더 자세하게는 '마흔이 넘도록 손바닥만한 편협한 관점의 소유자였던 한 사람을 변화시킨' 힘. 아니다. '한 사람'이라니. 셀 수 없이 많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갈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세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작가와 우리가 지향해 마지않는 그런 세상에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 할지라도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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