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Aug 28. 2023

"나도, 더 가보고 싶"은 것뿐.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_소설을 읽을 때 나를 지배하는 감각은 주로 시각이다. 펼쳐진 페이지는 곧 얇고 투명한 스크린이 되고, 나는 거기에서 한줄기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그림자나 누군가의 미세하게 경련하는 꼭 다문 입술 같은 생생한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조금 달랐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줄곧 나를 인도한 것은 목소리였다. 조곤조곤하게 읊조리는 가만한 목소리. 다큐멘터리 <인간극장> 이금희 아나운서의 차분한 음성과는 결이 다른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내 귓가에 머무는 동안 만큼은 내가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착한 사람이 된 듯한 묘한 착각은 어떤 소망과 이어졌다.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자상하고 지극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살뜰한 눈빛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인생만사에 떳떳함보다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왜 그토록 부끄러운지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그 부끄러움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솔직하게 글로 쓸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그런 소망을 품지 않고도, 잠시 품었다 놓치더라도, 영영 모르더라도 살 수 있다. 살아질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놓지 않고 싶다. 어쩌다 놓치더라도 곧바로 다시 붙들고 살아가고 싶다.


_"같은 시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책상에 앉아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해했다."(p.27)


"그토록 나약해 보이는 당신 안에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글로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당신도,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글 쓰는 일이 쉬었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p.75)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을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p.79)


"정윤 언니가 그랬지. 나는 이 문제로 글을 쓸 수 없다고.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몰라. 가끔씩 언니들의 마음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서 내가 언니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정윤 언니의 말을 생각해.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모른다고. 착각하지 말자고."(p.80)


_"'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을 했다.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p.44)

나도 작가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고, 작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을 했다. "나도, 더 가보고 싶"은 것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