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1, 2], 필립 로스
_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모르는 건 당연히 모르겠고, 안다고 여겼던 것도 모르겠고, 안다고 확신한 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알고 있다, 믿는다, 확신한다. 이런 말은 점점 꺼내기가 겁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서 알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지만 때로는 의문이 든다. 얼마나, 어떻게, 어디까지 알아야 보이는 걸까. 얼마나, 어떻게, 어디까지 볼 수 있는 걸까. 아니, 나는 알 수 있을까, 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 시대, 이 나라, 이 부모 아래서 태어났을까. 저 사람은 왜 그 시대, 저 나라, 저 부모 아래서 태어났을까.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그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왜 나는 이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저것을 그르다고 생각할까. 왜 저 사람은 내 생각과 다를까. 왜 나는 이것을 믿고 저것을 믿지 않을까. 왜 저 사람은 저것을 믿고 이것을 믿지 않을까. 왜 나는 이것(이 사람)을 미워하고 비난할까. 왜 저 사람은 그것(그 사람을) 좋아하고 옹호할까. 나는 왜 이런 욕망을 품고 있을까. 저 사람은 왜 저것을 갈망할까. 왜 나는 살아 있는데 저 사람은 죽었을까. 왜 내가 아니고 저 사람일까. 왜 저 사람이 아니고 나일까. 왜 내 삶은 이런데 저 사람의 삶은 저럴까. 우리는 다를 뿐인 것을 왜 틀리다고 할까. 그래야 왜 직성이 풀릴까. 우리는 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아갈까. 어째서 견디고 버티며 살아내고 있을까.
그러니까, 인간은 뭐고 삶은 뭐고 운명은 뭐고 우연은 뭐고 역사는 뭐고, '우리'는 무엇일까.
_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감전된 듯 자주 멈칫한다. 일 초씩 착착 돌아가던 시곗바늘이 멈춘 것만 같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미지근한 피가 순간적으로 끓는점을 넘어 펄펄 끓는 것 같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지만 머릿속이 환해진다. 이내 다시 희끄무레해지지만. 여전히 무력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뭔가가 터질 듯 가득 찬다. 곧 다시 무력해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희뿌연 머릿속과 무력한 가슴을 가진 스스로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내가 조금은 마음에 든다. 작가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 행간과 글을 읽고 있는 그 시간 만큼은 말로 표현할 수 정도로 충만함을 느낀다.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으면 알 수 있다. 무엇을 알 수 있냐고? 세상에서 가장 명징하고 영원한 진실을.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_"우리와 우리라는 담화가 자행하는 폭압,(...)우리의 폭압, '여럿이 모여 하나'라는 음흉한 의식과 더불어 강압적이고 모든 것을 어우르고 역사적이고 피할 수 없는 도덕률인 우리를(...)"(1권, p.175)
"인생이 얼마나 쉽게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릴 수 있는지, 운명이 얼마나 우연에 좌우되는지.....한편으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음에도 운명이란 때론 얼마나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지 이해하며 걸음을 옮겼다.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그 자리를 떠났던 것이다."(1권, p.201)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나로선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어떤 일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안다고? 인간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사고들, 불화, 충격적인 부조리의 연속인 난맥상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요, 루 교수.(...)우리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상투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는 것도 실은 알지 못한다. 의도? 동기? 결과? 의미? 모르는 건 전부 놀랍게 느껴진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이다."(2권, p.17)
"무자비한 사람들과 무방비한 사람들, 그게 바로 빌어먹을 인류의 역사다."(2권, p.67)
"역사의 올가미에 걸려들고만 남자. 아직 역사가 되지 못한 역사. 지금도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역사,(...), 우리 스스로가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후대 사람들이 이해해낼 역사.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라는 올가미. 지금 이 순간, 공동 운명, 현재의 분위기, 모국의 정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자체인 역사의 올가미. 모든 것에 내재된 끔찍한 임시성에 허를 찔렸던 것이다."(2권, p.210)
""어머니는 아버지만큼 잘 보이지 않네요. 모자 그늘에 얼굴이 좀 가려져서."
"사람이 인생을 통제한다고 해도 그 정도인 거죠." 어니스틴이 말했다."(2권,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