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_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 무언가에 홀린 듯 바로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읽지 않았다. 그냥 책 속에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고 긴 풀들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오솔길을 걸어가는 여자와 소녀의 뒤를 따라 걷는다. 허공을 가르는 남자의 손을 출발 신호로 삼아 전속력으로 뛰어간 소녀가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낸 뒤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하나, 둘, 셋, 을 센다. TV 뉴스를 보는 내내 무릎에 앉힌 소녀의 맨발을 느긋하게 어루만지는 여자와 함께 뉴스를 본다. 새 구두를 신은 아이가 미끄러질까 걱정되어 사포로 구두 밑창을 문지르는 남자를 곁에서 지켜본다. "물러가는 파도를 향해 달리다가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자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치는 소녀와 그 아이를 목말을 태워 바닷가를 걸으며 무서울 거 없다고 말하는 남자와 함께 걷는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이별의 날, "울퉁불퉁한 자갈을 세차게 밟"으며 전속력으로 달려 남자의 품에 안긴 소녀와 그 아이를 안아 들고 한참 동안 꼭 끌어안는 남자를 보며 눈시울이 미지근하게 데워지는 것을 느낀다.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면서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은 여자의 들썩이는 어깨에 가만 손을 올린다. 소녀를 안아 든 남자의 등 뒤로 다가오는 소녀의 아빠를 보며 엷은 한숨을 내쉰다. 슬픔, 상실, 운명, 사랑, 수용.... 이런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떠다닌다. 그리고 깨닫는다. 삶이구나. 이게 삶이다.
_세 번째로 첫 페이지를 열고 책장을 넘기자 어느새 나는 "맡겨진 소녀"가 되어 있다. 소녀의 눈으로 보고 소녀의 귀로 듣고 소녀의 피부로 느끼고 소녀의 발로 걷는 나를 발견한다. 무서웠다가 긴장했다가 눈치를 보았다가 부끄러웠다가 서글펐다가 안도했다가 안심했다가 기뻤다가 행복했다가 죄책감을 느꼈다가 당황했다가 슬펐다가 아쉬웠다가 슬펐다를 반복한다. 나는 그 소녀였다. 그리고 또 깨닫는다. 그래, 이게 삶이구나.
_여백이 많고 조용하다. 그런데 어느샌가 그 조용함의 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소설이다. 느리고 잔잔한 장면과 풍경 속에서 한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무엇인가에 홀린 듯 첫 페이지로 돌아가게 하는 소설. 기꺼이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치도록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는 소설. 정말이지 "소설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