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 사람들의 용기와 인내"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김현아

_오만방자한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말해본다. 평소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며 (공감과 연민도 느끼겠지만 이와는 별개로) '나와 내 가족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과 감사함에 푹 젖어 삶의 충만함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고 싶다. 물론 불운에 맞닥뜨린 타인에 비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무사하고 별탈없다는 것에 안도하고, (신앙이 있다면) 절대자에게 감사기도를 바치기도 하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인간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연대감과 책임감이 결여된 공감과 연민, 안도감과 감사함이다.


나이가 들고 어설프게나마 삶을 살아가면서 점점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 개인과 세계, 개인과 자연. 언뜻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실은 연결되어 있다고. 이 연결고리의 구성원 중 하나에 발생한 어떤 일은 반드시 다른 구성원에게 그에 따른 영향을 주기 마련이므로, 수많은 연결고리 중 하나인 나와 당신도 매순간 영향을 주고 있고 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의식을 하든 못하든, 미비하든 강력하든 그 파장의 영향력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다시 말해 나의 말과 행동, 눈빛과 표정, 생각과 가치관, 행운과 불운 같은 것들이 다른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때론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섬뜩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섬뜩함과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연대감과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_여기 한 가족이 있다. 대한민국 최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 부부와 두 딸. 겉으로 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이 가족은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다. 만성 우울증을 앓는 큰 딸, 양극성 장애와 경계성 장애를 앓는 작은 딸. 특히 작은 딸은 7년 동안 수시로 공황발작을 일으키고 자해를 해서 정신병원 보호병동(예전의 폐쇄병동) 입퇴원을 수차례 반복해왔고 현재도 같은 상황이다. 매일, 매순간이 살얼음판 보다 더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는 가족이다.


그럼, 나는, 이 가족을 전혀 모르는 나는 이 가족의 불운과 고통에 어떤 책임이 있을까? 내가 이들의 불행이 발생하는 데에 관여한 바가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가족이 살아내야 할 그 이후의 삶, 그 이후에도 이어질 삶에는 내가 관계되어 있다. 위나 간에 문제가 생기듯 뇌에 문제가 생긴 정신질환자들 - 자신의 몸을 칼로 그어 피를 내는 사람들, 정신병원 보호병동의 단단한 철문 뒤에 입원한 사람들 - 을 나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떤 눈빛과 표정으로 바라보았었나.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정신병자 아냐?' 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 않았었나.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들을 잠재적 위험인물 또는 무능력자라고 매도하지 않았었나. 나와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아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었나. 아니, 그들을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구성원으로 여기기는 했었나. 그들의 고통에 잠깐 공감한 뒤 금방 잊고는 나와 내 가족이 아닌 것에 다행이라고 안도하지 않았었나. 어쩌면 나와 내 가족이 맞닥뜨릴 수도 있었던 불운과 불행이었음에도.


나는 분명히 책임이 있다. 그들이 살아내야 할 '그 이후의 삶'에는 나는 분명 책임이 있고, 그러므로 연대감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희귀난치병에 걸려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증상이 수시로 일어나는 딸아이를 얄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야기하고 싶듯이 말이다.


'내 딸이 지닌 병에 당신의 책임은 없어요. 하지만 이 병을 지닌 채 살아내야 하는 내 딸의 앞으로의 삶에는 당신의 책임도 있어요.'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잠깐 공감하다 금방 잊고마는 사회에서는 언젠가 마주하게 될, 불가피한 당신의 불운과 고통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거예요. 운 좋게 피해간 타인의 불행을 보며 안도감과 감사함만을 느끼는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결국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_이 책의 저자와 그 가족의 용기, 분명 안간힘을 내어 냈을 그 용기에 진심어린 존경을 표한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그리고 또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우리의 연대감과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없이 모자란 이야기를 용기 내어 하게 된 이유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바꾸는 데 작은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큰 변화는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바위를 뚫는 물처럼 일상의 작은 변화들이 모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루어진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용기와 인내이다."(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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