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_한 남자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남아 있다. 마비된 듯 얼어붙은 남자의 주름진 손에는 편지 한 통이 들려 있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채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남자의 몸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눈동자다. 회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몹시 흔들린다. 희끄무레한 탓에 평소에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회갈색 눈동자가, 하얗게 질린 낯빛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것이 또렷이 보인다. 요동치듯 흔들리는 것은 또 있다. 그의 마음이다. 어느 날 받아든 편지 한 통에 "속수무책"으로 동요된 그는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회한의 감정"을 "속수무책으로 견"디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것 말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견디고 있을 뿐이다. 말장난 같지만, "속수무책으로 견딜 수밖에 없"으므로 "속수무책으로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이 "회한의 감정"이니까.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늘 향해 있기에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붙어버린 원시적인 감정"(p.172)이 회한이니까.
그를 속수무책으로 만든 것은 한 통의 편지다. 이 소설에서 편지가 가진 힘은 실로 대단했다. 그렇다는 건 물론 나중에야 알았다. 그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니까. 아무튼 느닷없이 날아온 편지를 따라 그는 사십 년의 기억을 더듬는다. 시간이 조각내고 흐트려놓은 기억들을 하나 하나 그러모으고 유심히 살펴본 뒤 퍼즐을 맞추듯 끼워맞춘다. 그의 퍼즐은 완성되었다. 아니, 그만의 퍼즐이 완성된 듯 보일 뿐이다. 하지만 편지는 아니라고 하면서 그를 이끌었다. "허세덩어리"였던 젊은 시절에 어울렸던 친구들과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찾아가도록 했다. 거기서 그는 또 한 통의 편지를 만난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달라지게 했고 달라지게 할지 모르는 편지를.
삶을 달라지게 하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 작은 행동, 사소한 선택. 모든 것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될 수 있음을, 이제 나는 안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다. 역시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래서일까. 요즘의 나는 자주 멈칫한다. 내가 내딛은 발걸음 하나가 어디로 이어질지 몰라서. 지금 여기서 내가 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몰라서 두려울 때가 많다. 그리고 이 '선택'이란 것에 온전한 '내 것(내 의지, 내 노력)'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헤아려보면 겁이 난다. 세상에는 '나'와 관계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연. 운명. 팔자. 나이가 들수록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무서워진다.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역시 삶은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삶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되는 게 있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자주 기망하는지를.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무섭고도 경이로운 일인지를.
_이 소설은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간혹 감상할 때도 있지만 이 소설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것은 부러 영화를 찾지 않는다.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떠올리고 그려본 나만의 장면을 깨트리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다. <밤에 우리는>이 그랬고 <맡겨진 소녀>가 그랬다. 이번에는 (내 머릿속에 그려본) 편지를 든 채 얼어붙은 '토니'의 주름진 손이 그랬고 요동치듯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그랬다.
_"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지금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기억해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p.76)
"회한의 감정(...)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나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 개선의 여지조차 없는 감정이었다.(p.172)
"'토니, 당신은 이제 혼자야' 라는 마거릿의 목소리. 그리고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라는 베로니카의 목소리(...)누가 말했던가? 살면 살수록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사라져만 간다고."(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