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이더
_나의 10년. 어느 여름날 이후 완전히 달라져버린 10년. 슬픔 속에 깨어나 슬픔 속에 하루를 보내고 슬픔 속에 잠들었던 10년. 슬픔이 아예 가슴에 둥지를 틀어버린 10년. 슬픔이 일상이 되어버린 10년. 그리고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 예상되는 10년들. 이러한 10년들은 나에게 올 때 하나의 의문을 품고 왔고, 올 것이다. 너무도 고집스럽고 집요해서 어리석게도 여겨지는, '왜 하필...'로 시작하는 질문을.
믿지도 않은 신을 향해 나는 물었다. 답을 얻지 못했다. 지금껏 읽어온 책에게 물었다.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각종 사건 사고를 다루는 시사 다큐멘터리에 물었다. 역시 답을 찾지 못했다. 언제부턴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애초에 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나는 묻고 또 묻는다. 이렇게 끝없이 묻고 나면 답을 얻게 될 것이라 광신도처럼. 하지만 답을 찾는다한들 뭐가 달라질까. 이미 딸아이의 몸속에 새겨진 유전자 지도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나는 딸아이의 엄마고, 내 딸은 그 애인 것을. 그럼에도, 끈질기게도, 의문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우주에 어떤 계획이 있다면, 인간의 삶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갑자기 중단된 저들의 삶에 숨겨진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p.15)
_당연하게도, 이 소설에서도, 답을 구할 순 없었다. "우연"인지, "계획"인지, 둘 다인지, 둘중 어느 것도 아닌지. 하지만 다른 답은 찾았다.(새로운 답은 아니다) 소설은 다른 질문을 하라고 한다. 의문사를 바꾸라고.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그러니까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내 딸이지?' 대신 "어떻게 살아야(사랑해야) 할 것인가?"(p.216)하고 묻고, '왜 하필 저들이지?'하고 묻는 것에 그치지 말고 '어떻게 저들을 도울 수 있을까?'라고 물으라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p.218)된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사랑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나에게는 몹시도 어려워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며 충실히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현명하고 용감한 사람이 나는 아니다. 지난 10년간 그러했듯 앞으로의 10년들도 나는 '어떻게'보다 '왜'를 더 많이 품고 살게 될 것이다. 영영 '왜 하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끝내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물을 테지. 도돌이표가 무한히 반복되는 돌림노래처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_"지금 이 순간에도 나 말고 에스테반과 페피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카밀라만이 그녀의 아들과 피오 아저씨를 기억하고, 오직 이 여인만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