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야 한다.

[할매], 황석영

_나는 혼자서 온 게 아니다. 나는 엄마에게서 왔고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서 왔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외증조할머니와 외고조할머니에게서 왔다. 엄마도 엄마 혼자서 온 게 아니다. 엄마는 외할머니에게서 왔고 외증조할머니에게서 왔고 외고조할머니에게서 왔다. 나에게 나의 삶이 있듯이 엄마의 삶이 있었고 외할머니에게는 외할머니의 삶이 있었고 외증조할머니에게는 외증조할머니의, 외고조할머니에게는 외고조할머니의 삶이 있었다. 나의 삶이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우주와 함께 살아왔듯 엄마의 삶도 외할머니의 삶도 외증조할머니의 삶도 외고조할머니의 삶도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우주와 함께 살았다. 내 속에 하늘과 바람과 땅과 물, 다시 말해 우주가 들어 있듯 엄마와 외할머니와 외증조할머니와 외고조할머니의 속에도 우주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우주가 겹겹이 층층이 쌓여 있는 거다.


나의 기원의 기원의 기원의 기원의 기원의 기원을 되짚어가다 보면, 나의 태고적 기원은 "큰할매 팽나무" 씨앗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 씨앗은 저 멀리 시베리아 어딘가로부터 겨울을 나러 한반도로 먼 길 날아온 "개똥지빠귀 뱃속에" 들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팽나무나 개똥지빠귀새와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연결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어쩐지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이 말은 너무나 명백한 나머지, 오히려 사실 같지 않고 심한 과장처럼 느껴진다. 아니면 너무나 지당한 사실임을 본능적으로 인정하게 된 뒤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로 자연스레 마음먹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9.8뉴턴의 힘으로 나를 잡아당기는 지구 중력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듯. 대기의 21퍼센트를 차지하는 산소로 인해 호흡을 하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음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듯.


_<할매>. 지상에서 거의 3센티미터 정도는 떠 있는 채로 읽었다. 조금 달떴던 것도 같다. 어디선가 읽었던, 우리 모두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떠올라 괜히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아침 산책길에 지나쳤던 많은 것들 -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과 겨울에도 초록잎을 달고 있는 키 작은 관목들과 간밤에 내린 비로 생긴 물웅덩이와 주인과 함께 산책 나와 나무 밑동을 킁킁거리던 강아지와 어슬렁거리며 자동차 아래로 몸을 숨겼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이 모두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심장 어딘가가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결심을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닌데 간지러운 심장 근처에서 다짐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잘 살아야겠다. 잘 살아야 한다.


_"동수는 돌아서서 갯벌을 걷기 시작했다. 뭍에서 걷는 것과 달라서 어디만큼 왔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달빛이 등 뒤로 쫓아와서 발 앞에 제 그림자를 앞세우고 걷는 듯했다. 다만 멀리 보이는 하제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며 걸었따. 희부연 달빛이 있긴 했지만, 몸의 몇 발자국 바깥은 어둠이었다. 동수는 저 혼자 이 너른 갯벌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멈춰 서서 들어보고는 그는 깜짝 놀랐다. 아주 작은 소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들이 온통 가득했다. 그는 한참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엔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게 다 무엇이었을까. 헤아릴 수 없는 구멍마다 생명들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합창이었다. 갯벌이 밤에는 거대한 노래밭인 거다. 동수는 그 정적 소의 소리를 방해할 까 두려워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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