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다섯 마리의 밤], 채영신
백만분의 일 혹은 수만분의 일의 확률로 일어나는 일. 기적과 같은 행운이든 피하고 싶은 불행이든, 그것은 흔히 볼 수는 없지만 세상에 존재한다. 누군가 814만분의 1의 확률이라는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가 얼마나 큰 환희에 빠져 있을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의 경우, 이를테면 치료법이 없는 희귀난치병을 앓거나 불의의 사고로 인생이 한순간에 망가진, 당사자와 그 가족의 삶이 어떠할지는 우리는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어쩌면 상상만으로도 부정탄다며 고개를 내젓는 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하고만 싶은 불행이기에 우리는 그로 인한 고통이 어떠할지 헤아리는 것 또한 피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이런 불행의 한가운데서도 살아가는 이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들은 그 불행의 희박한 확률을 생각할 때마다 억울하고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힘겹다. 끝없는 박탈감과 막막함, 두려움과 불안함, 외로움과 서글픔을 그림자처럼 달고서도, 막연한 희망에 늘 배반당하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흔하지 않은 이들의 흔하지 않은 고통과 상처는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문학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개 다섯 마리의 밤'이 뭔지 알지, 엄마?"
(...)
"기억이 안 나."
"아주아주 오래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추운 밤에 개를 끌어안고 잤대. 조금 추운 날엔 한 마리, 좀 더 추우면 두 마리, 세 마리.....엄청 추운 밤을 그 사람들은 '개 다섯 마리의 밤'이라고 불렀대. 이래도 기억 안 나?"(p.209)
이 소설은 수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는 알비노증후군을 앓는 열두 살 아이(세민)와 엄마(박혜정)의 이야기다. 태어나면서부터 "동물원의 동물"을 쳐다보는 듯한, 집요하고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뎌야 했던 모자(母子)의 혹독한 삶을 끌어안기에는 "개 다섯 마리"로도 부족해 보였다. 상황은 다르지만 내 딸아이 역시 '세민'과 비슷한 처지이기에 그들의 삶을, 일상을, 마음을 뼈저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엄마 자신도 경험이 없어 짐작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자식을 눈앞에서 봐야 하는, 내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심정을 '박혜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들에 관한 건 볼 수밖에 없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 세민의 머릿속이 궁금하지만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은"(p.86) '박혜정'의 나약함을 나는 가슴 깊이 이해했다. 엄마에 대한 아들의 원망을 듣고만 있는 '박혜정'에게서 미래의 내 모습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박혜정'이 내 곁에 있다면, 그 앞에서 원없이 울 수만 있어도, 오랫동안 명치께에 뻐근하게 뭉쳐 있던 서러움이 조금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온전히 기댈 수 없었던 나를 '박혜정'이 처음으로 위로해주었다.
한편으로는 '세민'을 통해 딸아이가 겪었을 그리고 겪을 아픔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연민과 배척이 뒤섞인 타인의 시선에서 아이가 느꼈을 외로움을 나는 모른다. 아이가 아프기 전까지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받아야 할 시선이 어떠한지 모른다. '엄마는 모를 거야'라고 말하는 딸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안아줄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애의 두려움과 불안함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에게 화를 내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p.63)는 '세민'을 통해 사무치게 깨닫는다. 고통 앞에서는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음을, 아니 아이가 느끼는 아픔이 더 예민하고 깊다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 세심하게 아이의 상처를 보듬어주어야 함을.
세상의 모든 아픔을 품은 듯한 소설이다. 희귀난치병 환자와 엄마, 집단 따돌림, 양부의 성폭행, 비뚤어진 모성애, 이단 종교 집단의 혹세무민, 자살 등. 그래서 조금은 억지스럽고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삶을 춥게 만드는 요소"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니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니까. 잘 만들어 놓은 세상의 축소판 같은 작품이다.
읽고 필사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백만분의 일이라는 흔치 않은 불행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나를 처음으로 속속들이 공감해준 소설이다. 누군가는 오직 소설 속 허구의 세계와 인물만을 통해 위로 받는다. 누군가에게 문학은, 소설은 유일한 구원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