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삶

[난민, 세 아이 이야기], 앨런 그라츠

아비규환(阿鼻叫喚), "여러 사람이 비참한 지경에 빠져 울부짖는 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곳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아수라장이었다. 뉴스를 통해 접한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은 충격적이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조금도 없는 군용 화물기를 가득 채운 얼굴들, 비행기 철제계단을 앞다투어 오르는 사람들. 눈으로 보면서도 나와 동시대에 사는 이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오버랩되며 떠오른 흑백의 이미지. '1.4 후퇴' 당시 미국 군함에 타기 위해 흥남부두에 모여든 피난민과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을 가득 채운 피난민의 모습들.


나와 내 가족이 저곳이 아닌 이곳에 존재하고 그 시대가 아닌 이 시대에 태어난 것에 안도감과 감사함을 느끼며 지나치기에는 울렁거리는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문. 왜 나는 이런데 그는 아닐까, 왜 우리는 아닌데 저들은 그럴까. 세상에는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야',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니까' 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삶이 너무도 많이 존재한다.


여기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세 아이가 있다. 이들의 목표는 하나다. 바로 "탈출".


1939년을 사는 유대인 소년 조셉, 1994년을 사는 쿠바 소녀 이자벨, 2015년을 사는 시리아 소년 마흐무드. 열두 살 조셉은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쿠바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고, 열한 살 이자벨은 독재자의 횡포와 폭동을 피해 집에서 만든 조잡한 보트에 몸을 실어 미국으로 향하고, 열두 살 마흐무드는 계속되는 내전으로 폐허가 된 시리아를 떠나 독일로 향하는 긴 여정을 떠난다. 이 세 아이는 가상의 인물이나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소설에 의하면 난민들은 세 번의 삶을 산다고 한다. 고국에서의 위태로운 삶이 그 첫 번째다. 운이 좋게 고향을 탈출한 사람들은 새 정착지를 찾는 두 번째 삶을 시작하는데 맨몸으로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는 등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많은 난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숙식을 위해 떠돌아 다니고, 수용소에 머물다 질병에 노출된다. 세 번째는 이 모든 역경을 통과해 자유를 찾은 국가에서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 환경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다.


소설은 조셉, 이자벨, 마흐무드의 '세 번의 삶'이 교대로 나오며 진행된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으로 몰려 짐승 취급을 받으며 갖은 박해를 받는 삶. 총과 폭탄에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는 폐허나 다름없는 곳에서의 삶, 작은 고무보트에 목숨을 맡긴 채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망망대해를 건너며 눈 앞에서 가족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삶. 참혹, 처참,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극한에 이른 삶.


쾌적한 환경에서 활자를 통해 접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데, 하물며 아무 죄 없는 열 살 남짓한 어린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이 삶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지 태어났을뿐인데. 그것도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몇 년 전 세상을 움직였던 사진들. 터키 해변가에서 익사한 채 발견된 세 살 쿠르디, 온몸에 재를 뒤짚어 쓰고 피범벅을 한 채 무감정의 얼굴을 한 다섯 살 옴란 다크니시. 소설 속 시리아를 탈출한 마흐무드가 탄 작은 보트가 난파되어 파도에 휩쓸리는 긴박한 장면이 연상된다. 쿠르디와 옴란 다크니시에게는 총성과 폭탄이 일상인 시리아가,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차가운 바다가 그들이 아는 세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왜 내가, 우리가 아니고 그들인가? 왜 여기가 아니고 저기인가? 왜 지금이 아니고 그때였는가?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상은 단지 이상일 뿐, 우리가 딛고 숨쉬는 세계는 본래부터 이상적으로 생겨먹을 수 없는 곳이란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다.


각종 구호단체가 편집한 단편적인 영상만 지나치듯 보았던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난민이 처한 삶이 알던 것보다 더욱 처참해서.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우리나라로 무사히 구출된 일부 아프간 난민을 보며 다행이라는 마음 한켠에 자리한 '더 많은 난민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그러면 안 되는데'했던 나의 위선이고, 한때 전쟁 난민이던 선조들을 두었음에도 탈출 난민의 대부분을 우리가 아닌 유럽이 수용하기로 했다는 기사에 내심 들었던 안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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