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 이름의 무게

디디의 이야기

매일 스스로를 심판대에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엄마'들이다. 죄목은 이러하다. 아이에게 짜증내서, 잘 놀아주지 못해서, 아픈 애 떼어놓고 출근해서, 자식이고 뭐고 어디론가 혼자 떠나고 싶다는 불온한(?) 마음을 품어서 등등. 얼핏 사소해 보이는 이 목록은 '엄마'들에게는 가책과 회한의 죄목이 되어 평생을 따라다닌다.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죄의식과 불안감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의 결론은 언제나 같다.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다'라는 것.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모유를 충분히 먹이지 못한 것에서 시작된 나의 죄의식은 아이가 다섯 살 때 발병한 극희귀난치질환이 모계 유전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더욱 극심해졌다.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니 먹고 잠자며 삶을 영위하는 매 순간마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하지만 자꾸만 원점으로 돌아오는 듯한 육아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며 '엄마'들은 때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이 버겁다. 누군가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한탄과 욕망을 속으로 삼킬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출산은 물론 결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모든 걸 버리고 멀리 도망가고 싶다'고. 이런 생각을 잠시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엄마’들은 자신의 속내를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어쩌면 육아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동료 엄마들과의 푸념 섞인 수다가 이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우엔 한바탕 육아 성토대회가 끝난 후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 찜찜했던 적이 많았다. ‘육아’를 제외한 모든 상황이 다른 그들과의 대화는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상대적 박탈감이든 위로라는 가면을 쓴 위선이든 마음을 심산하게 만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최근 국내 소설계는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활발한 추세다. 특히 아이를 키우며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육아를 소재로 한 소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서유미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 정한아의 [술과 바닐라], 김이설의 [잃어버린 이름에게] 외 다수가 그런 작품이다.


"'엄마 되기'는 내가 되면 안 돼요.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아이들이 대가를 치르게 되니까.(…)아이들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랑이 있는 것처럼 구는데,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기도 벅찬 불완전한 존재들이거든요."(정한아, [술과 바닐라], p.259)


"짙어져가는 어둠과 적막 속에 홀로 있게 되자, 그녀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종일 혼자 되기만을 원했다는 것을. 비단 강의 가족뿐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까지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정한아, [술과 바닐라], p.205)


"삶의 중요한 시기를 지날 때마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이제 누군가와 가까워질 가능성은 별로 없고 친구라 해도 좋을 만한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p.126)


'엄마'와 '나 자신'이라는 불완전한 두 정체성 사이에서 극심한 혼돈의 시기를 보낸 작가들의 고뇌가 담긴 소설에는 내 이야기가 고스란히 있었다. 끝없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인물에 나를 강렬하게 이입시켰다. 나를 대신해 자신의 욕망을 분출한 이를 통해서는 짜릿함을, (대부분의 현실 ‘엄마’들이 그렇듯)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애틋한 동지애(?)를 느꼈다. ‘엄마’라는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자조 섞인 공감일 뿐일지라도 그들에게서 얻는 위로는 그 무엇보다 더욱 깊이 와닿았다.


'엄마'들은 "아이가 태어나고,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이란 것을 알고 나면 그 생명을 키우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그리고 '과제'를 수행하며 깨닫는다. 사회는 물론 스스로가 더욱 강요하는 '모성애'라는 것은 출산과 동시에 충만한 상태로 생겨나지 않는 것임을.


소설은 일깨워준다. ‘육아’에는 본질적으로 “기쁨만큼이나 슬픔이, 어린 생명이 주는 충만함만큼이나 자멸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일 갈등과 후회를 반복하며 자책하는 ‘엄마’들이 사실은 지극히 정상적인 ‘엄마’의 모습임을. ‘엄마’들은 소설을 통해 ‘자기 억압의 굴레’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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